
전남 해남 앞바다 보길도의 세연정(洗然亭).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시인인 고산 윤선도가 1637년 병조호란 때 인조(仁祖)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입으로만’ 대의명분과 정의를 외치는 사대부들에게 환멸을 느껴 유토피아를 찾아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정자를 지어 글을 쓰면서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흐르는 계곡을 돌다리로 막아 얕은 연못과 그 가운데에 소나무가 있는 풍경은 그의 명작인 ‘어부사시사’ 만큼이나 아름답다.1) 그러나 세연정 밖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피폐해졌고, 국가 운영의 근간인 세제는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득세로 재원의 일실이 만연되었던 시기였다. 고려 멸망의 주된 원인이 세제의 붕괴였음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세금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포함한 당대 지배계층의 세금에 대한 인식은 고산이 살았을 시대보다도 더 엄중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본다. 1)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1587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1671년 보길도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여러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고 1628년에는 인평대군(훗날 효종)의 사부이기도 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14년 7개월을 함경도 경원 등에서 유배생활을 한 비운의 경세가(經世家)였다. 하지만 그 집안은 호남 3대 갑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부유하였으며 노비도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요즘말로 하면 재벌 집안에서 태어나 양과 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엄친아’인 셈이다.
세종이 만든 공법(貢法)
그가 살았던 시대(1585~1671년)는 세종대왕이 만든 공법(貢法)이 실시되고 있었다.2) 이 법에 따르면 조(租)ㆍ용(庸)ㆍ조(調)라는 기본 세목을 통해 조선의 재정수입이 확정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세목인 조(租)는 토지에 대한 세금(즉, 전세 田稅)으로 토지 수확량의 10%를 세금으로 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와 같은 획일적인 징수체계가 불합리하다고 보고, 보다 세분화한 세금징수체계를 만들었다. 즉, 과세물건인 토지를 ⅰ)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전분 6등, 田分 六等) ⅱ) 흉년과 풍년의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연분 9등, 年分 九等) 분류하여 이를 수치화해 징수한 것이다. 납부액은 [(1결(結)3)당 20말 × 토지비옥도 최상(1) × 풍년(1)]의 공식에 따라 산출되나, 토지비옥도가 낮을수록 그리고 기후가 나쁠수록 상수 1보다 낮은 비율을 적용하여 납부액을 산출한다. 예를 들면, 비옥도가 중간이고 기후여건도 중간이라면 토지 1결당 납부액은 5말(20말 × 토지비옥도 0.5 × 기후지수 0.5)로 결정된다. 2) 이 법은 1444년(세종 26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자세한 내용 : 문점식, 「역사 속 세금이야기」, 세경사, 2018, 34-38면 참조). 3) 1등전의 경우 10,809㎡(3,275평)에 해당한다.
공법(貢法) 보다 더 혹독한 공물(貢物) 제도
조(租)ㆍ용(庸)ㆍ조(調)의 조(租)는 토지라는 명확한 과세대상과 납세의무자가 토지의 소유자라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으나, 또 다른 조(調)는 지역 특산물, 즉 공물(貢物)을 과세물건으로 하고 납세의무자가 관아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조(租)는 주로 쌀과 콩을 세금으로 받았지만 또 다른 조(調)는 필요한 물품들이 생산되는 곳에서 해당 물품을 직접 거두었다.4) 공법이 실시된 직후 조선의 재정수입은 조(租)에서 90%, 공물에서 10% 정도를 조달했다.5)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제도가 변질되었다. 토지 소유자 대부분은 양반(兩班)이었는데,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선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하여 조(租)의 부담을 낮추기 시작했고 그 부족분은 공물(貢物)로 대체되었다.6) 이렇게 되면 양반들의 세금 부담은 줄어들지만 양민들의 부담은 곱절로 늘어난다. 조(調)의 부과권자는 왕이고 납세의무자는 지역 관아인데, 관아는 그 부담을 양반이 아닌 양민(良民)에게 전가했다. 4) 2021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라는 영화에서 정약전의 제자인 장창대가 목격한 흑산도를 관할하는 수령의 공물(貢物) 수탈 장면은 조(調)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5) 이정철, “조선시대의 세금과 민본정치사상”, 儒學과 現代, 博約會大邱廣域支會, 2014, 169면. 6)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전조 수입이 조선 초기에 비해 1/4 수준으로 낮아졌다고 한다.(이정철, 위의 논문, 168면)
광해군의 대동법(大同法) 실시
그런데 특산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고 경제 환경의 변화의 영향에 따라 조(調)의 납부는 특산물 대신 쌀 등으로 일단 납부하고 난 뒤 그 쌀을 팔아 특산물을 구입해서 납세의무를 이행했다. 이 과정에서 뇌물을 받을 목적으로 고의로 퇴짜를 놓는 방납(防納)이 횡횡하였다.7) 이 폐해를 시정하고자 광해군은 1608년에 대동법(大同法)을 도입해 공물의 상납을 폐지하고, 그 대신 1결(結)에 쌀 12두(斗)를 징수하도록 하였다.8) 그 결과 양민들의 세부담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종전의 20%만 부담하면 되었다. 그러고도 조선의 재정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80%는? 탐관오리가 가져간 셈이었다. 요약하면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시대의 세금은 세종이 만든 공법(貢法)과 광해군이 정리한 대동법(大同法)이 병존하였으며, 양반의 세금부담은 낮아졌고 양민의 부담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 대동법의 실시로 그 부담이 완화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7) 비슷한 예로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을 때 봉헌하는 비둘기를 고가에 매매한 종교인들의 행태에 분노한 예수의 질타가 있었다(요한복음 2 : 14-17). 8) 대동법은 1894년에 이르러서야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고산 윤선도의 세금행적
그렇다면 고산 윤선도는 세금제도 정비과정에서 무엇을 하였던가? 그 역시 상당기간 관아의 수령을 지냈으므로 조(租)ㆍ용(庸)ㆍ조(調)의 폐해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내용 중 세금과 관련된 내용9)을 보면 당시 참혹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대부분 현종10) 시대의 것이다). 9) 조선시대의 세금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할 수 있다. 10) 조선 제18대 왕으로 효종의 외아들이고 숙종의 아버지이자 경종과 영조의 할아버지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 태어났다. 즉위 직후 조 대비(趙大妃)의 복상 (服喪)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당쟁을 벌여 많은 유신(儒臣)이 희생되었으며,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12월에 명하여 윤선도(尹善道)의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 (…) 봄철에 징수하는 삼남(三南)의 대동미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출처 : 현종 왕 행상> “심지어 바다 가운데의 바위돌까지도 모두 세(稅)를 거두고 있으니 그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출처 : 현종개수실록 9권, 현종 4년 7월 26일 신묘 6번째 기사> 10월에는 풍뢰(風雷)의 이변이 있었다. 왕은 재야의 유신(儒臣)들에게 실봉(實封)을 갖추어 아뢰도록 명하고, 백성의 전결이 몰래 궁가의 면세 전결에 등록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출처 : 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흉년이 들었을 때 납기를 연장하거나 가산세를 탕감하며, 체납된 세금의 징수를 독촉하지 말고(납부기한 연장), 세원관리를 철저히 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과세물건에 대한 세금부과를 없애되 조세감면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산 윤선도 개인의 세금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조(租)의 납세의무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에서 그가 부담하는 조(租)에 대한 불만을 담은 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11) 반면 징수권자의 입장에서 조(調)의 납세현장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은 그가 과거시험을 준비 또는 관료 재직 시절에 작성한 동시집(東詩集)12) 에서 찾아볼 수 있다. 11) 임금의 스승을 지낸 경력이 있기에 일반 백성과 달리 억울한 세금을 부담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추정할 수 있다. 12) 일명 ‘과체시(科體詩)’라고도 하는데 이는 과거시험 과목에 있는 시작(詩作)의 일종이다. 시(詩)는 고려 광종 9년(958년) 5월 과거제도를 시작하면서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관리 선발의 중요한 과목이었고, 과거에 합격한 뒤에도 매월 시작(詩作) 시험을 실시하였다고 한다(임귀남, 「고산 윤선도 東詩集 ≪私稿≫ 選譯」, 전남대학교 대학원 한문고전번역협동과정, 박사학위논문, 2022, 1-2면).
관리들 끝까지 탐하여 찾기를 독촉하기 바쁘니, 짜놓은 실 모두 바치고 말없이 울기만 하네. 빈 처마 아래 베 짜는 기계 던져버렸으니 엄동설한을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시 제목 : 베틀과 북만 빈 채로 벽에 기대어 있네; 출처 : 임귀남, 위의 논문, 135면). 시골마을 잠시 조용하더니 세금을 독촉하고 그늘진 계곡을 오르는 얼룩 범이 끊었구려. 탐관들 내쫒으니 짐승도 사람에게 멀어져, 문득 사방 지역에 고아나 홀아비 기뻐하네(시 제목 : 호랑이가 많아지자 간탐들을 몰아내다; 출처 : 임귀남, 위의 논문, 294면).
이를 해석하면 첫 번째는 세금으로 납부하는 베의 양이 너무 많아 아예 그 베틀을 버렸다는 얘기이고, 두 번째는 공자가 태산을 지날 때 어느 여인이 묘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 이유를 묻자 호랑이가 시아버지와 남편을 해치고 아들까지 해쳤다고 하니까 그럼 이곳을 왜 떠나지 않는가를 물어보니 그래도 이곳 태산은 가혹한 정치(苛政)가 있는 들판보다 낫다고 대답한 것(苛政猛於虎)에 본을 딴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적어도 고산은 이와 같은 조(調)로 인한 폐해의 심각성을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다. 행정가로서 무리한 징세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보인다. 세금의 창으로 볼 때, 고산은 세금이론서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쓴 정약용, 대동법 제정과정에서 헌신한 이원익(李元翼), 조익(趙翼), 김육(金堉) 등과는 거리가 있는 경세가라고 본다. 그리고 세연정에서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냈다.
끝은 시작의 다른 말이다
해남 땅끝마을에 서서 보면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는 물론 정약용의 다산 초당, 정약전의 흑선도, 대흥사의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와 운림산방의 허련이 보인다. 장보고의 청해진도 손에 잡힌다. 고래 힘줄 같은 역사가 묻혀 있는 곳이다. 이웃 일본에는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고산 윤선도의 사고는 사서삼경과 중국 이외의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을까. 그 하찮은 예송논쟁에 휘말려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는가. 두 달란트를 받았지만 능히 다섯 달란트 이상을 남겼을 그였는데,13) 그리고 그가 맘먹기에 따라선 보길도를 뛰어넘어 르네상스를 일으킨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비견될만한 세계적 명문가문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의 인생은 세연정에서 그쳤다. 아쉽다. 마침 이 부근에서 멀리 않은 곳에 고향을 둔 IT기업가들이 수천억 원 이상의 기부금을 쾌척했다는 소식이 있다. 깨끗한 부자들의 타자를 향한 대가 없는 헌신은 우리나라를 새로운 차원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름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이게 흥하면 나라가 살고 이게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땅끝 마을은 육지에서 보면 끝이지만 바다에서 보면 시작이다. 끝은 시작의 다른 말이다. 세연정을 뛰어 넘는 문화의 창달과 도래를 기대한다. 13) 마태복음 25: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