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트럼프의 경제 설계도, ‘미란 보고서’가 그리는 관세와 환율전쟁 시나리오
우리가 트럼프의 광기 어린 관세전쟁과 환율 압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 할 보고서가 하나 있다. 지난해 말 워싱턴 정가에서 주목받은 유명 싱크 탱크인 허드슨연구소가 발표한 소위 ‘미란 보고서’다. 스티븐 미란 선임연구원이 주도한 이 보고서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정책 제안을 넘어, 트럼프 2기 경제 정책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담고 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고서의 핵심 진단은 명료하다. 미국의 고질적인 무역적자와 제조업 쇠퇴의 근본 원인을 ‘고평가된 달러’로 지목한 것이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늘 실제 가치보다 높게 평가받고, 이것이 미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려 만성적인 적자를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보고서는 파격적이고 공세적인 두 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첫째는 ‘전략적 관세’의 전면적 활용이다. 관세를 글로벌 무역시스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상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환율 문제의 적극적 개입’이다. 보고서는 과거 일본 엔화 가치를 절상시켰던 ‘플라자 합의’에 빗대어, 이른바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 같은 새로운 국제공조를 통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환율전쟁’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및 금융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동맹국들에게 ‘공정한 분담’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관세로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미란 보고서’의 제안들은 트럼프가 평소 강조해온 ‘미국 우선주의’와 정확히 맥을 같이 한다. 무역적자 해소와 미국 제조업 부활이라는 그의 오랜 숙원을 해결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자 미란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했다.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상호관세’ 폭탄
지난 4월 3일 트럼프 대통령이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 칭하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 폭탄을 터트렸다. 10%의 일률적 기본 관세와 대미 무역흑자국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라는 사상 초유의 조치가 공개되자, 이는 자유무역 질서의 근간을 흔들었다. 실제 발표 직후 글로벌 금융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의 S&P 500 선물지수는 장중 –4.8%, 나스닥 종합지수는 –6% 가까이 폭락하여 2020년 팬데믹 이후 일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일본 니케이지수(-2.8%), 독일 DAX지수(-3.1%) 등 해외 증시도 동반 급락했다. “세계 경제 상황이 어제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해외 지도자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고, JP모건은 올해 세계 경기 침체 확률을 60%로 올렸다. 이러한 시장 충격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관세 정책을 강행하며 추가 압박에 나섰다. 특히 중국에는 기존 관세를 포함 사실상 145%에 달하는 초고율 관세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에 중국과 유럽연합(EU), 캐나다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상응하는 보복관세를 천명했다. 한편 한국, 일본, 인도, 멕시코 등 일부 국가는 일단 미국과 협상을 모색하겠다며 즉각적 보복을 유예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비전형적 동조화 현상 발생
이처럼 주식시장 약세 기조가 뚜렷해지면, 곧 통상적인 위험회피 장세라면, 안전자산이라 일컬어지는 미 국채로 수요가 몰려 국채 가격 상승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국채마저 투매 현상을 겪으며 가격이 떨어졌다. 그 결과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불과 며칠 사이에 3.8%에서 4.5%로 70bp나 급등했다. 이렇게 시장금리가 상승하면 통상 달러는 강세를 나타낸다. 금리가 곧 그 나라 통화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트럼프의 불가측성이 미국의 신뢰를 떨어뜨려 달러 약세를 부른 것이다. 이처럼 이번 사태는 주가와 채권 가격이 동반 하락하고 달러 약세가 진행되는 비전형적 동조화 현상을 불러왔다. 이는 시장이 전면적 무역전쟁과 글로벌 경기둔화 가능성을 급격히 반영한 탓이었다.
달러 약세가 불러온 대체 자산 급등
이번 관세전쟁 속에서 금(金)은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전통적 안전자산이다. 연초 온스당 2,600달러 선이던 국제 금 가격은 무역분쟁이 고조되자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위기 심리를 반영했다. 특히 4월 들어 금은 거의 매일같이 사상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고, 4월 22일에는 장중 온스당 3,500달러 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때 금 선물 가격은 연초 대비 30% 이상 상승한 수준으로, 2020년대 들어 가장 가파른 안전자산 랠리가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각국 중앙은행들 역시 금을 꾸준히 사들이는 추세에 있다. 트럼프 당선 후인 2024년 4분기 전 세계 중앙은행 금 매입량은 전년 동기대비 54% 급증한 333톤으로 추정되며, 금 보유고를 늘려 대달러 방어막을 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금의 상승 추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 자산은 이번 위기 국면에서 두 단계에 걸쳐 엇갈린 움직임을 보였다. 관세 충격 직후 초기에는 가상화폐가 위험자산으로 분류되어 주식시장과 동반 급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 4월 초 비트코인 가격은 며칠 새 15% 이상 급락해 5만 달러대 중반까지 밀렸다. 그러나 중순 이후 암호화폐에 대한 평가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달러 약세와 금융 불안에 따른 대체 자산 선호가 부각되면서,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과 유사한 헤지수단으로 재평가받은 것이다. 4월 말 비트코인 가격은 7만달러 선을 돌파하며 한 달 동안 40% 가까이 상승했고, 5월 22일에는 11만달러 고지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헤지 및 통화정책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 수단으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암호화폐가 글로벌 자산 배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경제, 직격탄을 맞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이 같은 조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국은 한국의 2위 수출 시장으로, 자동차와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이 타격을 받을 우려가 컸다. 특히 한국 제품에 대해 25% 관세가 예고되자 정부는 긴급 대응에 나섰고, 외교적 채널을 총동원했다. 일주일 후, 트럼프 대통령이 “비보복 국가에 대해 90일 유예”를 선언하면서 한국의 관세율은 일단 10%로 낮아졌다. 이번 관세 공세로 세계 교역량 위축 우려가 확산되며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성장률 전망을 0.5%p 낮춰 2.8%로 수정했다. 한국은 중국의 경기둔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인한 간접 피해까지 우려되고 있다. 이후 5월 28일 미국 연방 국제무역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를 부과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조치라며 행정부의 핵심 경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혔다. 법원은 백악관이 근거로 삼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은 거의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일방적인 관세 부과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또 법원은 미국 헌법상 외국과의 무역을 규제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의회에 있고, 이는 대통령의 경제 보호 권한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판결이 발표되고 불과 몇 분 만에 트럼프 행정부는 항소를 제기했다. 그러자 연방항소법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해 제출한 판결 효력 정지 요청을 받아들여 해당 판결의 집행을 일시 중단한다고 결정했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 고문은 기자들에게 “우리는 (법원에서) 패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의 국가 안보 우려를 근거로 자동차, 철강, 알루미늄에 부과한 관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어떤 법원에서도 제동을 건 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조항을 바탕으로 앞으로 반도체 등 다른 산업 분야에 대한 관세를 인상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과거 1기 행정부 시절 중국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자 활용한 1974년 ‘통상법’ 제301조를 다시 근거로 삼을 수도 있다. 아울러 수십 년간 인용되지는 않았으나, 미국을 “차별하는” 국가의 상품에는 최대 5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1930년 제정된 ‘통상법’ 제338조도 존재한다. 하지만 백악관은 현재 이번 연방 무역법원의 판결을 무효화 하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이 사안은 대법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상기 ‘비상경제권한법’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관련 법들이 다수 존재하여 트럼프의 관세 공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방 압력 받는 환율
보통 글로벌 위기가 발생하면 달러화가 ‘안전통화’로 강세를 보이지만, 이번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적인 관세로 달러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자, 4월 초 이후 달러인덱스는 3년 만의 최저치까지 하락하며 5% 이상 가치가 떨어졌다. 이는 통상 주식 급락 시 달러로 자금이 피신하던 과거 패턴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 약화로 “주가 폭락 → 국채 금리 상승 → 달러화 약세”라는, 전통 경제이론과 어긋나는 역설적 장면이 전개되었다. 전 연준 의장 재닛 옐런조차 “전통적 안전자산인 달러와 미 국채를 투자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면서 달라진 시장 심리에 주목했다. 가장 즉각적인 반응은 우리 환율 시장에서 나타났다. 한국 원화는 글로벌 환율 변동 속에서 높은 변동성을 보였다. 특히 5월 1일 대만이 미국과 통화협의를 개시한다는 소식에 신흥국 통화들이 들썩이며 원화 가치가 급등했다. 5월 2일 하루 원ㆍ달러 환율은 장중 최고 1,440.0원까지 상승했다가 미ㆍ중 협상 진전 기대에 야간에 1,391.5원까지 급락하여, 하루 변동폭이 무려 48.5원에 달하는 등 사상 초유의 변동성을 기록했다. 이는 2022년 7월 외환시장 거래시간 연장 이후 일간 최대 변동폭이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별도 환율 협의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진 5월 14일에는 원화 가치가 급등하며 환율이 하루 30원 이상 떨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원화는 미국의 환율 압박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요동쳤다. 시장은 ‘제2의 플라자 합의’인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 원고에 대처해야 하는 절박한 환경을 맞이하여 정면 승부를 펼쳐야 할 시기이다. 수출기업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