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계의 사회적 역할
지나간 100년 동안 회계는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인프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수많은 이론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해왔고, 지속적인 회계기준의 제정을 해왔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무보고서의 공급을 통해 시장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업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예외 없이 재무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재무보고의 결과를 기초로 수많은 투자와 자금지원이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자원의 사회적 배분이 이루어집니다. 국내에서도 수백만의 개인사업자와 50만이 넘는 기업들이 매년 사업성과를 측정·기록하고, 그 결과를 재무보고서로 정리하여 주주와 채권자에게 보고합니다. 약 3만개의 기업은 별도의 외부감사를 통해 보고의 적정성 여부를 검증 받으며 2천개 가까운 상장기업은 분기나 반기별로도 재무보고를 하고 검증도 받습니다. 회계는 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광범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합니다. 기업현장의 재무 인력은 최소한 수십만에 이를 것이고, 검증을 위한 회계, 재무, 세무전문가도 수만명에 이릅니다. 또 재무자료의 생산을 지원하는 IT 등 각종 인프라에 투자된 돈은 수십조원에 이르고 기업들은 매년 지속적으로 수조원의 재원을 투자합니다. 시스템의 개발이나 유지보수에 필요한 재원과 인력은 제외하고도 말입니다.
사회적 관심과 기대
회계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회계를 위해 이처럼 많은 자원이 투자되고 있음에도 사실 오래전부터 회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회계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기업 경영자나 투자기관, 채권금융기관의 책임자들도 재무제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재무보고서를 직접 보고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회계는 어렵고 복잡하다. 잘 모르겠다.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무보고의 내용이 시장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계가 정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지, 현재 제공되는 정보가 기대만큼 충분히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원하는 정보
전통적으로 회계정보의 이용자는 투자자와 채권자입니다. 하지만 자본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채권자보다는 투자자의 정보욕구가 더 커지고 강해지고 있습니다. 투자자를 위해 재무제표가 제공하는 정보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특정기간의 기업의 성과, 즉 이익입니다. 둘째는 특정시점의 기업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투자자가 원하는 정보는 무엇일까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익과 기업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투자자가 원하는 기업의 가치와 회계상 재무제표에 표시되어 있는 기업의 가치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자가 생각하는 기업의 가치는 시장에서 평가되는 기업자체의 가치, 즉 “기업가치(corporate value)”인데 비해서 재무제표가 제공하는 기업가치는 기업이 보유하는 총자산에서 총부채를 차감한 “순자산가치(net asset value)”입니다. 사실 순자산가치와 기업가치는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우량기업들, 특히 성공적인 선진기업의 경우 순자산가치와 기업가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산가치와 기업가치의 차이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업가치가 세계최고인 회사들입니다.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이들 기업의 기업가치는 각각 850조원, 700조원, 600조원 정도입니다. 반면 대차대조표상의 순자산가치는 각각 140조원, 160조원, 80조원에 불과합니다. 세계 10대 기업안에 포함된 두개의 전통기업인 존슨앤드존슨과 엑슨모빌의 경우조차도 순자산가치는 기업가치의 50%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의 기업 중에서도 네이버, 아모레퍼시픽의 경우도 순자산가치는 기업가치의 20% 미만입니다. 어느 회사이든 대부분 순자산가치는 기업가치의 20%에 못 미칩니다. 그렇다면 기업가치와 순자산가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그 차이의 원천은 기업이 가지고 있는 무형자산입니다. 모든 기업은 무형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유한 무형자산의 종류나 성격, 규모는 기업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공장과 기계장치 등 유형자산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수익을 실현하는 전통적인 제조업이나 장치산업들은 유형자산의 비중이 크고 무형자산의 보유 비중은 비교적 적습니다. 반면에 기술이나 비즈니스모델을 중심으로 한 첨단기업들(기술기업 포함)은 무형자산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수익을 실현하는 바 유형자산보다 더 크고 많은 무형자산을 보유합니다. 무형자산에는 법으로 보호를 받는 상표, 기술, 인허가, 지역적인 사업기반 등도 있지만,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다양한 전략적 자산들이 포함됩니다. 예컨대 선점한 시장이나 충성고객, 핵심기술인력, 비밀리에 진행 중인 신규사업, 독점적인 원재료 공급원, 규모의 경제 이런 것들이 모두 무형자산에 포함될 것입니다. 모두 수익을 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업의 원천이며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핵심자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무형자산은 현재의 재무보고서에는 기록되지도 인식되지도 않으며 체계적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시장에서 형성되는 기업의 가치에는 무형자산의 가치가 상당한 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무형자산이 순자산가치와 기업가치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입니다.
재무회계의 과제
전통적인 회계정보가 이용자의 요구를 총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많은 회계분야의 전문가들이 전통적인 회계정보 이외에 해당기업의 경쟁력과 그 원천 등을 알려달라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제회계기준이 공정가치평가를 과감하게 도입하고 자산의 손상여부를 회계에 반영한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입니다. 인수합병을 통해 획득한 영업권의 회계처리에 관하여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도 이런 고민의 일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회계정보이용자의 새로운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논의가 유형자산에만 집중되어 있고 기업가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무형자산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IASB를 포함한 회계기준제정기구들이 기업의 비재무보고(환경보고, 지속성보고, 통합보고)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재무회계를 비재무분야까지 확대하여 기업의 광범위한 활동을 기록하고 보고할 것인지에 대한 망설임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이런 관심과 논의 또한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재무회계가 무형자산을 간과한 상태에서 비재무적 요소들을 무분별하게 재무보고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은 재무회계에 혼란만 가중시킬뿐 투자자들의 기대를 합리적으로 충족시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무회계의 범위를 기업의 순자산가치에 대한 보고에서 기업가치의 보고까지로 확대하고 무형자산에 대한 기록과 보고를 도입하는 것이 재무회계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라고 판단됩니다. 문제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 많은 장애물이 있을 것이며 해결책을 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과거의 연구가 지적하듯이 무형자산은 (금융자산이나 유형자산과 달리) 식별과 구분인식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자산의 획득이나 증감이 기업의 지출과 쉽게 연계되지도 않습니다. 식별과 구분인식이 된다 하더라도 가치측정이 어렵고 그 가치의 변동성이 너무나 큽니다. 식별과 가치측정이 되더라도 통상 분리매매나 환금성 같은 자산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합니다. 전통적인 회계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가능한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재무회계의 미래
국제회계기준위원회를 비롯한 전 세계의 회계제정기구와 회계업계, 그리고 학계의 전문가들은 재무회계의 유용성을 높이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시행될 수익기준서, 금융상품 기준서는 물론 최근에 발표된 보험기준서 등은 이러한 자속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회계의 유용성과 가치를 지키고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미시적인 노력과 함께 무형자산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반드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형자산을 재무회계에 반영함으로써, 재무회계는 투자자들의 주요 관심사인 기업가치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며 재무보고의 이용자들은 개별기업의 경쟁력과 잠재력에 대한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