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정권이 내놓은 구호 중 가장 엉뚱한 것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다. 1994년 10월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로 어수선한 와중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대통령의 일성(一聲)은 세계화였다. 전임 정부에서도 수출 드라이브에 맞춰 국제화를 비중 있게 추진했는데 세계화라는 신조어가 생뚱맞게 등장했다. 세계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학자들이 방송에 출연해 ‘국제화와 세계화의 차이’를 설명한다며 버벅거렸다. 한국의 지성 이어령 교수의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라는 촌철살인은 통쾌한 카타르시스였다. 세계화 구호가 난무하는 와중에 1995년 6월에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당시 64메가 D램을 앞세운 삼성전자의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자본시장 개방 가속화로 외화가 몰려들면서 달러값은 급락했다. 대구의 섬유, 부산의 신발 등 전통적 수출품목이 저환율 때문에 수지를 맞추지 못해 쓰러졌다. 1996년부터는 국제적 공급과잉으로 반도체 가격이 폭락했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섰다. 부도덕과 무책임의 대명사인 한보와 기아가 부실로 쓰러지면서 은행 부실이 노출됐고, 외국자본이 외화를 거둬 철수하면서 외화부도 위기에 몰리자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경제주권을 넘겨야 했다. IMF는 부실기업의 신속한 정리를 위해 고금리를 압박했고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부채비율 200%를 강요했다, 불황과 고금리에 휩쓸리면서 30대 대기업 중 절반이 몰락했다.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 세계를 누비던 종합무역상사도 엉망으로 망가졌다. 종합무역상사 제도는 적합한 요건을 갖춘 효율적인 업체를 선정해 집중적으로 지원할 목적으로 1975년부터 시행됐다. 삼성물산, 대우실업, 선경, 효성물산, 현대종합상사 등 13개의 기업이 지정됐는데 현재는 7개가 남아 있다.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는 계열사 간 이동은 있었지만 회사 이름은 그대로다. 선경은 SK글로벌을 거쳐 SK네트웍스로, 효성물산은 효성T&C(구, 동양나이론)와 합병해 효성으로 사명을 바꿨다. 대우실업은 대우인터내셔널을 거쳐 포스코에 인수되면서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됐다. 대우그룹은 연리 30%가 넘는 고금리 상황에서 채권발행으로 연명하며 2년을 버티다 1999년 8월 워크아웃 처리됐다. 회계부정에 대한 금융감독원 및 검찰 조사 결과 김우중 회장과 임직원에게 징역형과 함께 18조 원의 추징금이 선고됐다. 계속기업을 가정하고 원가 중심으로 계상한 장부가액과 청산과정에서 떨이로 넘긴 헐값의 차이를 회계부정으로 몰아붙였다. 선경은 SK글로벌로 재편됐는데 외환위기 와중에 누적됐던 분식회계가 2003년에 적발됐고 수뇌부가 집단으로 구속돼 실형이 확정됐다. 대부분 종합무역상사가 떠안은 부실자산과 부외부채는 주채권은행에서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SK글로벌 사건에 대해 변호사 실무경험이 있는 당시의 노무현 대통령이 수차례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겨우 벗어난 동유럽과, 가난으로 헐벗은 아프리카 등 열악한 환경의 신시장 개척 단계에서 지출된 경비는 적법 증빙 확보가 매우 어렵다. 중동 국가에서는 권력층에 대한 리베이트가 관습화됐고 매출채권 중 일정 비율은 아예 포기해야 거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회수 불능 채권과 재고자산 부족분은 종합무역상사의 가공자산으로 누적된다. 외환위기 여파로 해외 거점 시설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단계에서도 실물 없는 자산이 장부에 남는다. 그대로 청산한다면 채권은행이 대출금을 회수불능 대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다른 기업에 인계되거나 계열사 간의 합병으로 영업을 계속하면 가공자산이 영업망의 기반이 될 수 있는데, 그런 기대를 기반으로 합병회계를 운영하기도 했다. 정부로서는 부실 대출금 정리를 위한 공적자금 소요를 줄이는 긍정적 방안이기도 했다. 1998년에 효성물산은 효성T&C와의 합병을 통해 주식회사 효성으로 재편됐는데 그 과정에서 효성물산의 부실 및 가공자산을 기계장치 등으로 처리했고 매년 감가상각비를 계상했다. 합병으로 새롭게 출발한 효성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종합무역상사 업무는 정상화됐고 상당한 수익을 확보해 차입금을 정상적으로 상환했다.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과거 효성물산의 지출은 고객 호감도(goodwill)의 기반이 되는 영업망 자산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기업회계기준은 미국 기준과 같은 방향으로 운영됐고 합병 세무에서도 기업회계기준이 광범위하게 수용됐다. 당시 미국 회계기준에서 합병회계는 지분풀링법과 매수법 중에서 선택 적용했다. 지분풀링법을 허용하는 기준을 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매수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분풀링법은 주식교환을 통한 지분 통합에 의한 합병이 원칙이며 피합병회사의 장부가액을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초과수익력에 의한 영업권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 1998년의 미국 실무에서는 지분풀링법이 선호됐고 그 사용 비중은 52%였다. 효성물산을 효성T&C에 흡수합병한 효성의 경우 외환위기 혼란 속에서 일부 소실된 자산은 종합무역상사 업무를 계속할 기반인 영업망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효성은 이를 기계장치 등으로 장부에 계상하고 지분풀링 방식으로 합병 회계와 세무를 처리했다. 15년의 오랜 세월이 흐른 2013년 효성에 대한 세무조사가 실시됐고, 기계장치 등 실물이 없는 자산에 대한 감가상각비가 부인됨으로써 거액의 법인세와 가산세가 추징됐다. 현재 효성이 제기한 불복절차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기계장치 명목의 자산이 영업권인지를 다투는 쟁점에 대해 1심 행정법원은 초과수익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는 현행 회계기준인 매수법 논리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제회계기준이 합병회계를 매수법만 적용하도록 개정했지만 효성의 합병이 이뤄진 1998년에는 지분풀링법이 인정됐다. 따라서 외환위기 와중에 분실된 재고자산과 회수불능된 매출채권은 종합무역상사 업무 계속을 위한 영업망 기반으로 보아 자산으로 표시하고 감가상각비를 계상한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법에서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의 감가상각은 임의상각이 원칙이며 내용연수에 따른 상각범위액은 당해 사업연도에 인정되는 손금의 상한이다. 상한에 미달하는 부분은 차기 사업연도와 그 이후 연도로 넘겨 손금으로 계상할 수 있다. 영업망 자산은 영업권과 유사한 측면이 많은 점에서 5년 이내 균등액을 상각범위로 볼 수 있다. 효성이 영업망을 기계장치로 구분해 5년을 훨씬 초과하는 장기로 내용연수를 적용했기 때문에 연도별 감가상각비가 상각범위액을 초과하지 않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부의 외환관리 실패로 초래된 경제위기로 인해 부실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종합무역상사 효성이 각고의 노력으로 정상을 회복해 금융권 차입금을 온전히 상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부 회계오류에 대해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시점에서 엄청나게 누적된 가산세까지 얹어 추징하는 것은 가혹하다. 일부 형식적 오류가 있더라도 종합무역상사 업무 지속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고려한 합리적 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