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하합니다. 추첨결과, 승용차는 응모번호 24680번 고객에게 돌아갔습니다. 저희가 처음 불렀던 13579번 고객께서 안타깝게도 조금 늦게 나오셔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스포츠 경기나 공연 관람은 그 자체로 즐겁다. 덤으로 따라오는 또 다른 재미는 경품 추첨이다. 노트북이나 자동차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선수의 사인볼이나 유명 가수 사인 시디(CD)라도 하나 건지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경기장이나 공연장에서 혹시 이런 상상을 한 적은 없는가? 내 응모권이 추첨을 통해 자동차 경품에 당첨됐다. 그런데 내가 기쁜 마음에 경품을 받으러 가는 사이에 당첨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주최측이 새로 추첨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동차가 돌아가는 상황 말이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 법정에까지 온 적도 있다. 경품 자동차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실제 사건과 재판을 통해 알아보자.
시상대로 가는 사이 경품 자동차는 다른 사람에게
사례 세계육상경기대회가 열린 어느 도서의 육상경기장. 경기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각인 밤 9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바로 경품 추첨 때문이었다. 주최측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거액의 경품을 걸었다. 이날의 1등 상품은 하이브리드 승용차 1대. 본부석에 시상대가 만들어졌고 밤 9시 20분경 사회자가 등장했다. 사회자 옆에 놓인 응모함에는 관객들이 입장하면서 넣은 응모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제 승용차의 주인을 뽑는 1등 추첨을 시작합니다. 당첨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첫 번째 응모권을 조심스레 펼친 사회자는 당첨 번호인 ‘13579번’을 3차례 외친 후, “당첨되신 분은 본부석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몇 초 후 사회자는 “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부릅니다. 13579번! 하나, 둘, 셋! 무효입니다. 다시 추첨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잠시 후 사회자는 두 번째 응모권을 건네받고 “24680번, 24680번!”을 소리쳤다. 이때 본부석 바로 뒤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회자는 “드디어 당첨자가 나왔군요. 24680번 고객님 본부석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멀리서 본부석을 향해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13579번’의 응모권을 쥔 고등학생 이재수(가명)군이었다. “제가 원래 당첨자에요. 여기 보세요. 13579번!” 사회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에 24680번의 응모권 소지자까지 나타나자 장내는 술렁거렸다. 사회자는 본부석 관계자와 상의한 뒤 관중들에게 ‘당첨 번호는 24680번입니다’라고 발표하고서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뒤로 활짝 웃는 두 번째 당첨자와 울상을 짓는 이재수군의 얼굴이 대조를 이뤘다.
당신이 이재수라면 어땠을까? 야구로 치자면 9회 말 역전 만루 홈런을 때리고도 파울로 판정받은 기분 아니었을까? 억울한 심정의 이군의 마음을 몰라주는 현실은 냉정했다. 결국 이군은 자신을 당첨자로 인정해 달라며 대회조직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군의 주장은 이랬다. “처음 당첨 번호를 듣고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곧바로 제가 있던 좌석에서 본부석까지 180m 거리를 2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서둘러 갔어요. 주최 측은 본부석까지 이동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도 않고 당첨을 무효 처리한 겁니다. 억울해요. 당연히 제가 당첨자입니다.” 대회조직위원회는 이미 2차 당첨자에게 자동차를 넘겨줬다며 난색을 표했다. “우리는 당첨자가 나올 때까지 추첨하겠다고 분명히 알렸고, 번호를 4차례나 부르면서 기다렸어요. 그리고 당첨됐다면 우리가 알 수 있게 아주 크게 환호성을 질렀어야죠. 그땐 마냥 자동차 추첨만 할 상황이 아니었고 다른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곧바로 2차 추첨을 한 겁니다.”
당첨자 발표 후 도착까지 충분한 시간은 얼마?
당사자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 이상, 법원은 어쩔 수 없이 법률적인 판단에 들어갔다. 경품 이벤트의 법적 성격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법원은 계약, 그중에서도 증여로 봤다. 증여계약은 증여자가 무상으로 재산을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청약)하고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승낙) 효력이 생긴다. 즉, 경품 제공자가 당첨자에게 자동차를 제공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당첨 번호를 게시한 행위는 ‘청약’이 되고 당첨자가 당첨 번호를 제시하고 경품 수령 의사를 밝히는 것이 ‘승낙’이 되는 경품 제공 계약이라는 것이다. 따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더라도 주최측이 경품 자동차를 내건 이벤트를 알리고, 관객이 경품응모에 참여했다면 계약이 된다는 말이다. 다만 법원은 경품 이벤트가 승낙의 기간을 정한 계약이라고 판단했고 그 승낙 기간을 ‘경품 행사의 계속 진행을 위한 상당한 시간 내’로 정한 것으로 봤다.
<민법〉 제528조 제1항 승낙의 기간을 정한 계약의 청약은 청약자가 그 기간 내에 승낙의 통지를 받지 못한 때에는 그 효력을 잃는다.
이제 법률적 쟁점은 이 군이 ‘상당한 시간 내’에 ‘청약을 승낙했는지?’로 모아졌다. 그렇다면 상당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법원은 본부석에서 제일 멀리 있는 좌석을 기준으로 당첨 사실을 확인하고, 본부석으로 나와서 당첨 번호를 제시하는 데까지 걸릴 것으로 사회 통념상 예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법원은 제일 먼 좌석(본부석과 약 215m 정도 거리)을 기준으로 ▲성인 평균 보행속도가 시속 4~5㎞이므로 본부석까지 걸어오는 데, 2분35초~3분13초가량 걸리고 ▲당첨 사실 확인, 주변의 축하로 걸리는 시간 ▲관객으로 붐비던 계단과 통로의 상황까지 감안하면 적어도 4분은 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쉽게 말해 당첨 번호를 부른 후 본부석까지 오는 데, 4분 정도는 줘야 한다는 것이다.
경품 이벤트의 법적 성격은?
법원은 추첨 당시 상황을 초 단위로 재구성했다. 사회자가 1차 당첨 번호인 13579번을 부른 것은 총 4번이었으며, 총 45초 만에 당첨 무효 처리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18초 후 2차 당첨 번호인 24680번을 2차례에 걸쳐 약 10여 초간 불렀고 사회자는 환호 소리를 들은 직후 당첨사실을 확정했다. 그 무렵 1차 당첨자인 이재수가 본부석에 도착했고, 잠시 후 2차 당첨자가 도착했다. 이재수가 본부석에 도착한 시간은 1차 당첨 번호를 처음 알린 때를 기준으로 1분 37초만이었고, “본부석으로 나와 달라”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1분 20초 후였다. 정리하자면 주최 측은 1차 당첨 발표 후 45초 만에 당첨자가 없다고 판단해 무효 처리했고, 그로부터 약 30초 후에 2차 당첨자를 발표했다. 그리고 1차 당첨자와 2차 당첨자가 차례로 본부석을 찾은 것이다. 1차 당첨자 발표 후 당첨 무효 선언까지 걸린 시간은 45초에 불과했다. 45초는 평균 시속 17㎞(1초에 4.7~4.8m 속도)로 달려가야 본부석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 ‘상당한 시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이재수는 상당한 시간 내인 1분 37초 만에 본부석에 도착해 승낙의 의사표시를 했으므로 이것으로 정당한 계약이 성립됐다고 봤다. 또한 “충분한 당첨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재수에게도 과실이 있다”는 주최 측의 주장에 대해 법원은 “당첨된 후 소리 지른 사실이 인정되고, 그 이상으로 당첨 반응을 본부석을 향해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일축했다. 결국, 이군은 자동차를 놓친지 250일 만에 당첨자로 인정받게 됐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품 제공의 법적 성격에 대해 짚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다양한 세상을 법의 잣대로 공정하게 재판해야 하는 법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된다. 또한 경품 제공자 입장에게는 추첨 절차를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도록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경품 제공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속였다가는 아래의 사례처럼 심지어는 형사처벌을 받기도 한다.
공짜 이벤트라고 당첨자 조작했다간 형사처벌도
사례 A시장 상가번영회는 시장 건물 리모델링 사업 착공을 기념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경품 이벤트를 진행했다. 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넣게 하고 추첨을 통해 여러 사람에게 가전제품 등을 나눠주기로 했다. 상가번영회장인 B씨는 자기가 아는 C씨가 1등에 당첨되도록 힘을 썼다. 사회자에게 C씨의 번호표를 몰래 건네준 것이다. C씨는 드럼세탁기를 차지했지만 이를 수상하게 여긴 주민들에 의해 부정은 곧 드러났다. 주민들은 경찰에 B씨를 신고했다.
B씨는 법정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업무방해죄. 경품 추첨 행사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최근 유사한 사건에서는 경품당첨을 가족에게 몰아주려다 걸린 이에게 업무상배임까지 인정되기도 했다. 공짜 이벤트라고 속임수를 썼다간 큰코다친다. 꼭 계약서라는 제목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나 사이에 법적 성격에 따라 계약이 성립되는 경우도 있고, 어찌됐든 계약을 어기는 쪽은 불이익이 따르니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 혹시 자동차 경품에 당첨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온몸으로 당첨사실을 알려라. 법이고 뭐고 따지지 말고 최대한 서둘러라. 자동차가 걸렸는데 체면 차릴 게 뭐가 있나. 분쟁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새해에는 모두에게 행운이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