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아의 눈빛이 하도 맑아서 그 속에 흰구름의 하늘과 푸른 바다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현아의 눈빛이 하도 푸르러서 그 속에 철새가 날아들고 그리고, 현아의 입술은 물기에 촉촉이 젖어 있었다. 현아의 눈빛이 하도 깊고 고요해서 그 속에서 내 온갖 邪念이 눈물이 나려는 순간 겨우 진정되었다. 마침내 현아의 떨리는 가슴 위에 내가, 두려움과 존경스런 번민에 휩싸이는 얼음빛 같은 視線으로 머문다.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며 텅 빈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 눈송이들이 아침햇살에 무척 싱그러워 보였다.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머지않아 맑은 새소리도 들려오겠고, 개울 물소리 그윽할 때가 코앞인 듯 싶다. 겨울 속에서 바람결도 한결 가벼워져 여기도 저기도 봄맞이 채비가 한창이겠거니, 계절의 바뀜이란 어김없고 그 산천의 생명력이 여간 신비롭지 않다. 지난해 겨울이었다. 나는 난초의 꽃향기에 새삼 감탄했었다. 꿈속에서 사무실의 내 책상에 있는 난분(蘭盆)에서 꽃대가 솟아오르고 하얀 꽃송이가 벙글었는데 그 향기가 여간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책상 위에서 곱게 피어난 난꽃이 나를 반기지 않던가. 그리고 그 향기가 어찌나 그윽했던지 그날 온종일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꽃들은 어떻게 그 작은 품에서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그런 향기를 낳게 하는가? 지금 산천은 언 땅을 녹이며 봄을 그리워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산에도 들에도, 또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개나리는 개나리답게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자기 빛깔과 향기를 한껏 뿜어 낼 것이다. 산천은 그렇듯 잠시도 쉬지 않고 겨울 속에서 새 봄을 잉태한다. 그런데 이 땅 어디를 가나 산과 들이 성한 데 없이 파헤쳐지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봄을 잉태한 땅이 상처에 시달리 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란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거나 바뀌어져서는 안되는 것인데, 그 러고서 싱그러운 숲이 어찌 이뤄지겠는가. 우거진 숲이야말로 우리네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맑은 물을 길어내지 않는가. 이 땅을 금수강산이라 일컫던 게 옛말인 듯 싶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숲 속에서 양팔을 쫙 벌리고 자연의 기(氣)를 한껏 받아들여 보라. 거기에서 숲의 신비를 새삼 터 득해 보라. 그러면 자연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을 것이다. 언 땅에서 봄을 낙태시키는 죄과(罪科)를 스스로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가? 우리들 조상대대 물려 내려운 땅이다. 또한 우리 후손들이 이어받아 오래오래 살아갈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그 땅이 사람의 손에 더럽 혀지고 허물어진다면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삶이 온전치 못한 게 아닐까. 겨울과 봄의 사잇 길에서 더 더욱 안쓰럽게 여겨지는 일이다. 아무렴 내 언 가슴에도 요즘 봄기운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색깔이며 또 그 향기가 어떤지 를 알 수가 없다. 내 자신이 그걸 맡아볼 수 없으니 과연 이웃들에게 내 향기가 어떻게 풍겨지고 있을까? 며칠 전 꿈 속에서 현아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티없이 맑았다. 흰구름이 떠 가는 봄하늘인가 싶더니 푸른 바닷물처럼 깊고 고요했다. 순간 내 넋이 한꺼번에 빨려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들여 다보니 그녀의 입술이 물기에 촉촉했고, 온갖 사념(邪念)에 찬 듯 눈빛이 얼음장 같이 차디찼다. 현아가 왜 저럴까? 사람의 생각은 그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데, 그리고 그것은 흙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나중에 그것을 열매로 거두기 마련인데, 봄을 피워내기가 저렇듯 힘겨울까? 그때 현아가 돌연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흠칫 놀라 꿈에서 깨었다. 흔히들 봄꿈은 개꿈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겨울 꿈속에서도 난 꽃이 벙글더니 그게 사실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렇다. 나는 믿는다. 내 가슴속에서 현 아가 봄눈을 틔우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목이 말랐다. 머리맡의 생수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갈증이 이내 가시고 답답하던 속이 확 뚫리는 듯했다. 맑은 물은 역시 생명의 원천이다. 이 생수를 내가 어디서 길어냈던가? 산천 곳곳 마다 숲이 우거지면 거기에 맑은 물줄기가 사시사철 마르지 않으리라. 우리 인간사(人間事)가 바 로 그렇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요, 그래서 저마다 나름의 체취를 지니고 또 인품의 향기를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꽃들이 제각각 다른 색깔과 향기를 지니듯 사람이 그보다 못하면 그것은 곧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닐 것이다. 무심코 내다본 창 밖이 한결 푸근해졌다. 이 겨울의 마지막인 듯 싶게 함박눈이 온종일 내린다. 그래, 이럴 때 쯤 무엇이 내 안에서 숨쉬고 있을까. 무엇이 내 안에서 꿈을 꾸게 하며, 사람을 그리워하게 하는가. 문득 현아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