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수 태양이 그 스스로가 빛이듯 사랑도 그 스스로가 빛이네 세상의 미련을 털어내니 자신의 존재가 훤하고 삶이란 일상의 마음속에 햇살이 지붕을 이루니 사랑의 실체가 선하네
춘설(春雪)이 분분한다더니 요즘 같은 날씨를 두고 이르는 말일까.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이미 저만치 멀어졌는데 눈발이 제법 어수선하다. 아무렴 바람도 나름대로 뜻이 있어 불어대는 것이려니 자연의 섭리를 어찌 사람의 마음에 맞춰낼 것인가. 며칠 전에 칠성산엘 다녀왔다. 모처럼 친구들과 나선 산행이었는데, 산세도 험하거니와 사방이 칙칙하게 꽉 들어찬 소나무숲이 여간 스산하지 않았다. 눈 쌓인 골짜기를 할퀴며 몰아치는 바람 탓이겠거니 여기면서도 산속의 봄은 아직 멀게만 느껴졌다.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더니 빈말이 아닌 듯 싶었다. 그렇다. 자연현상 그대로가 곧 우리들 마음이라 해서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하지 않는가. 사람의 욕망과 물질과 정신을 일컬어 삼계라 하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제 나름의 행복을 누리고자 애쓴다.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어디서 얻는 것일까? 행복이란 결코 먼데에 있지 않다. 눈 속의 매화(梅花) 꽃망울에서 우리는 상긋함을 느낀다. 난롯가에서 책을 읽는 시간에서도 또 한밤에 마시는 한잔의 커피향(香)에서도 훈훈하고 달콤함을 맛본다. 이를테면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행복은 그렇듯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속에서 얻어진다. 그게 맑고 순수한 삶의 향기요 행복이다. 그런데 칠성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으면서 한 그루의 매화분(盆)을 만났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훈훈하고 상긋했는지 모른다. 매섭던 칠성산 골짜기를 벗어났다 싶자 봄이 어느새 가까이에 와 있었던 것이다. 눈 속의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한다. 봄의 전령이라 해서 일명 일지춘(一枝春)이라고도 하지만, 매화는 그 마른 가지에서 부풀어오르는 꽃망울이 여간 탐스럽지 않다. 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막 터질 듯한 꽃망울에서 얻는 충만감이 그만이다. 무슨 일을 계획할 때의 잔뜩 가슴 부푸는 기대감이 바로 그러하리라. 그리고, 이튿날 아침 귀경길 버스에 오도카니 앉았다가 문득 산밑에 외롭게 핀 동백꽃을 보았다. 무척 반가웠다. 아무리 눈 속에 피는 꽃이라지만 역시 봄 기운이 완연했다. 동백(冬柏)이라면 고창의 선운사 동백숲이 물론 일품이긴 한데 민둥산에 외롭게 핀 동백꽃을 바라보는 것도 시린 마음을 달래 주기엔 충분했다. 흔히 우리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망울이 흐려지면 마음이 어둡고, 눈빛이 맑으면 마음이 그 만큼 맑다는 것이다. 한데 매화나 동백꽃을 보던 순간만이 훈훈하고 반가웠을 뿐이니 속 깊은 내 마음의 봄은 어디쯤에서 머물러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눈이 얼마나 흐려져 있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내 영혼을 맑혀 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필요한 것만을 찾다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새삼 생각할 때인 듯싶다. 세상사에는 얻는 것 뒤에 반드시 잃는 것이 있고, 필요한 것 뒤에 불필요한 것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렇듯 숭숭하다. 인생무상이라더니 봄이 눈앞인데도 내 등이 왜 시리기만 할까? 사람도 좋은 짝을 만나야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떠날 때는 어떤가? 자기 영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가 없다. 사랑도 못 가지고 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보다 뜻있는 삶을 위해 틈틈이 자신의 분수를 추스린다. 무엇이든 분수에 넘치면 눈빛이 흐려져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답게 사는 마음가짐을 추스려야겠다. 그 사람답게 사는 일이란 무엇이랴. 내 삶에 있어 한 때의 기분이나 충동에 휘말리지 않는 일이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고,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일이다. 하나의 씨앗이 열매가 되기까지는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질서 속에서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 계절의 질서와 은헤에는 적당주의가 없다. 과속이나 추월은 더 더욱 용납되지 않는다. 해가 지면 밤이 되고 그 밤이 지나면 으레 해가 뜬다. 어둠 뒤에는 밝음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아침을 어김없이 맞는다. 그게 곧 창조적 삶이니까. 창조적인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 그 삶이 내게 가난을 터득하라고 일깨운다. 분수 밖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채찍질한다. 내 그릇에 만족하며 꿋꿋하게 사는 맑은 정신을 가꾸라고 다독인다. 이태 전 내가 파산지경에 빠졌을 때 한 선배도 그랬다. "뭣이든 하나가 필요할 때 다른 또 하나를 욕심내지 말라"고. 바로 삼계유심에 통하는 길이었다. 그 이후 나는 세상살이에서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잘 분별하라는 경계로 간직하고 산다. 그래, 기다리자. 이 꽃샘추위를 참고 견디면 내 마음이 평정을 이룰 때쯤 바람도 부드럽고 느긋해지겠지. 아무렴 우주질서란 세상의 어김없는 도리(道理)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