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容秀봄 언덕에 산에 푸르게 새살이 돋아나니 月下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마침내 내 중심을 꿰뚫네 내가 목례로 답하였네 그대는 오직 하나 그대는 사랑의 빛 내 바다를 넘치게 하고 靈魂을 깨우고 또 다스리네 나 지금 그대 안에 있네
모처럼 나들이를 겸해서 대룡산(大龍山)엘 다녀왔다. 부산을 벗어나 진해시(鎭海市) 관문인 용원검문소를 막 지나자 오른편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이었는데, 바다냄새 어우러진 봄기운이 무척이나 상긋했다. 간밤에 몇 줄기 봄비가 지나가서일까, 미명(未明)에 집을 나섰던 산행길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던 것이다. 산자락을 밟으며 용원포구를 내려다보자 가슴이 확 트였다. 나뭇가지마다 새살이 돋고, 풀잎도 초록햇살에 한결 투명하고 신선했다. 바가지로 떠 마신 물맛도 그만이었다. 산천의 맑은 정기를 몸과 영혼 속에 혼자서 다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그래, 산골짜기에 잔설(殘雪)이 녹아내리는 물소리가 아직은 차갑게 들렸지만 대룡산의 봄은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래서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새삼 인간의 삶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되풀이했었다. 한겨울의 빈 나뭇가지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이미 봄을 맞이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사랑이란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아무렴 그럴 것이다. 삶이란 누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니까. 삶이란 생명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이니까. 따라서 사랑 또한 남을 이해하는 마음, 남에게 너그러운 마음, 남을 돕는 마음, 남에게 웃음을 주는 그런 마음에서 싹트는 것이니까. 왠지 새삼스럽게도 내가 거듭 깨달은 일이다. 참으로 기분 좋은 나들이었다고나 할까, 역시 봄의 입김은 삶에 생명력을 틔워주는 듯싶었다. 그러니까 연(緣)인즉 그날 부산역에서 월하(月下) 스님의 마중을 받았고, 그 첫 만남에서 그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나를 부끄럽게 했던 것이다.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고, 그러한 삶 속의 사랑이 곧 인간세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월하스님은 대룡산이 굽어보는 대룡사(大龍寺)의 주지스님이다. 그는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석 달째 접어든다고 했다. 본시 50년이 넘은 관음사를 인수하여 대룡사라 개칭했다니 그의 일은 이제 막 시작인 셈이었다. 반세기 역사를 지닌 사찰답지 않게 그 면모가 작고 허름했다. 요즘 관광지를 앞세우며 장삿속으로 오염된 여느 사찰들에 비기지 않더라도 그의 할 일은 태산이다. 우선 등산로에 불과한 진입로를 불자(佛子)들이 오르내리기 편하게끔 닦아내는 게 급하고, 또 불자들의 쉼터인 마당도 울타리도 손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일들이 현재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라고 월하스님은 오히려 흐뭇해 했다. 어떤 일에든 지레 겁먹거나 엄두를 못 내어 하면 그 삶이 짐스럽지만 이게 내 일이다 싶으면 그 시작은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라고. 또 일에 쫓기지 않고 차근차근 헤쳐 나가면 도리어 삶의 여백을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나는 깨달음이 컸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얼마나 낯이 뜨거워지던가. (물론 대룡사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겠지만) 아무튼 월하스님의 더욱 큰 뜻은 이 땅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복지사업을 펴줄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렇다. 무릇 사람은 자기 주변에서 생기는 일들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얽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맑고 편안하면 그 둘레에 아늑한 그늘이 드리워지지만, 마음이 어둡고 조급하면 그 둘레가 불안한 기운에 휩싸이는 게 곧 생명의 메아리가 아니더냐.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고 월하스님은 강조한다. 그래야 그 내일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과거에 얽혀들거나 매달리면 현재의 삶을 소멸시키게 된다고. 우리가 겪는 불행 중 태반은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의 기억들을 털어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이 곧 나 자신의 내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그래서 하루하루 늘 새로운 시작을 찾아 기꺼이 맞이하라고. 흔히 사람들이 문득 전생(前生)과 마주친다고 한다. 가령 어떤 곳에 갔을 때나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까닭없이 호감을 갖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문득 마주친 사람이 첫 만남인데도 그저 편안하고 믿음을 한꺼번에 얻는가 하면, 반면에 인상이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정이 뚝 떨어지는 경우가 그렇다. 한데, 내가 월하스님과의 만남이 전자(前者)의 경우라면 그게 전생의 연(緣)일까. 월하스님은 내게서 과거를 털어내게 하고, 새로운 시작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눈빛이 내 중심을 꿰뚫고 들어와 영혼을 다스리는 것이다. 따뜻함과 아름다움과 새로움과 신묘함을 함께 지닌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진정 사랑의 빛이었다. 나는 그 동안 이웃에게 어떻게 따뜻함을 베풀었는가, 또한 그 따뜻함의 본질이 무엇이던가 새삼 부끄러웠다. 아무렴 이웃이 기쁘면 내가 기쁘고, 이웃이 괴로우면 나 또한 괴로운 것인데. 그리고 감정이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나는 것인데, 따라서 감정이란 인간 안에 깃들이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인데 내 어찌 몰랐을 것인가. 그 이튿날 아침, 월하스님과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우리는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에 대해 자기 생애의 저녁 무렵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까뮈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