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7일 토요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관광에 나섰다. 새벽 한시나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일행 모두가 여독이 덜 풀린 것 같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비행기에서 바라본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가지는 대낮처럼 밝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말저녁만 되면 파티를 열고 밤이 새도록 춤을 추던 남미사람들의 생활습관 때문인지 심야인데도 불구하고 야경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가지를 산책해 보니 거리의 풍경은 파리나 유럽의 어느 도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 우뚝솟은 오벨리스크와 현대식 건물사이로 고딕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중심가 거리의 노폭은 100미터나 족히 됨직한데 차들이 쉴세없이 다닌다. 기후는 어제 비가와서 그런지 보기드문 봄날씨다. 예년같으면 섭씨 30도는 되야할 절기인데도 최근 엘리뇨 현상으로 절기가 한달은 늦단다. 아르헨티나는 일년내내 태양빛이 작열하는 정글에서부터 365일동안 여름이 오지않는 빙하지대까지 남북이 3700㎞에 이르는 광활한 국토를 가진 나라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는 민둥산 하나없는 팜파스라는 목초지대이며 산을 보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타고 팔구백키로, 즉 차로 열시간 가량은 달려가야 한다니 알만 할 것이다. 이 광활한 영토는 1516년 스페인 탐험가 환 디아즈 데 소리스( Juan Diaz de Solis )에 의해 발견됐다. 은을 찾아서 아메리카 남쪽으로 내려온 이들은 진수의 바다라고 불리던 라플라타 강을 발견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1536년 카를로 5세의 명에 의해 파견된 멘도사였다. 그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도시를 건설하니 그것이 오늘날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다. 나중에 이 도시는 인디오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1553년 다시 재건된다. 이 후 1776년 스페인 정부는 현재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 외 일부까지를 묶은 광대한 영토를 "리오 데 라플라타" 부황령으로 승격시키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유럽과 남미대륙을 연결하는 중계항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식민지 행정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않던 크리오죠라 불리는 현지 태생의 스페인 사람들에게 해방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같은 시기에 미합중국이 독립했으며 180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영국군이 라플라타지역을 침범했으나 크리오조군에게 격파되었다. 1807년에는 나폴에옹이 거느리는 군대가 스페인을 점령했으며, 부왕이 브라질로 피난을 가자 아르헨티나는 1810년 5월 25일 독립된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선포한다. 5월 혁명이 그것이다. 농축산물을 중심으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20세기 초반,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때는 농축산물을 수출하여 큰 이득을 챙겨 중진국의 대열에 성큼 들어섰다. 그러나 유럽 지향성이 강한 부유층 계급은 사치에 돈을 물쓰듯 해 버렸다. 이로인해 저소득노동자계급의 불만은 높아졌으며 이들의 지지를 받은 페론 대령을 포함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테타에 성공하여 1946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페론은 외국자본 기업을 국유화 시키는 등 민족주의 고양으로 인기가 높았으나 독재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후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걷게된다. 그래서 출구가 없는 국내 정세에 시달리던 아르헨티나는 1982년의 포크랜드(말비나스)분쟁을 일으킨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국군의 상륙으로 개시된 이 전쟁은 2개월 후인 6월 14일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일단락 됐다. 이듬해에 정부는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알폰소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러나 전쟁이 준 피해로 인해 경제는 파탄되었으며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세계 10대 강대국의 한나라였으며 벌어들인 돈을 주체할 수 없어 중앙은행 복도에까지 금괴를 가득 채웠던 나라, 밤마다 선남선녀들이 콜론극장에서 세계 유명 오페라단을 초청해 공연을 감상하며 그들이 입었던 연미복을 세탁하기위해 파리까지의 전세 비행기를 띄우고, 보도를 40센치 두께의 이태리 대리석으로 깔 정도로 풍요를 누리던 이 나라가 왜 이리 되었는가? 얘기는 에비타(에바)가 열네살이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페론 대통령의 부인으로 모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었던 에바는 원래 사생아요 창녀 출신이었다. 배가 고팠던 그는 먹고 살기위해 배우가 되었으며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1943년 24세의 나이에 노총위원장이 된다. 이해에 페론 대령은 48세의 나이로 쿠테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태리계 이민후예였던 페론은 독일계 혁명주체 세력에 밀려 보사부장관이나 국방부장관을 지내는게 고작이었다. 이때 에바가 페론을 만나 대뜸 내말을 잘들으면 대통령을 시켜주겠다 한다. 즉 가지지못한 노동자 편에서서 이들을 도와주면 대통령에 당선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에바의 진언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던 페론은 나중에야 그 말의 진가를 알고 자기발로 에바를 찾아가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결구 페론은 에바 말대로 노동자 편에서서 노동법 개정에 간여하다가 투옥 되었으며 에바는 이에 대항해 전국 총파업으로 맞서 협상결과 페론의 전역을 조건으로 그를 석방시켜준 뒤 노동당(페론당)을 만들어 194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시킨다. 이때 에바는 그의 미모와 유창한 언변을 앞세워 전국을 유세하여 페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이때부터 1955년 군부쿠테타로 실각 될 때까지 페론은 에바가 시키는 데로 노동자 천국을 만들었다. 그의 재직 기간중 잘사는 사람들은 집앞 우체통 옆에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음식을 넣어 두는 박스를 만들어 두었으며 정부는 빵을 만들어 아침마다 길에 나와 실직자들에게 빵을 배급해 주었다. 도시마다 공장을 짓고 노동 시간도 주 5일로 단축하였으며 여성근로자에게는 3일간의 생리 휴가를 부여하였다. 농촌 근로자들은 도시로 몰려왔으며, 모든 사람들은 쉽게 살려해 아르헨티나의 제조업은 차차 경쟁력을 상실해 갔다. 농업국가였던 이 나라가 농업정책을 포기하고 제조업에만 신경을 쓰다가 제조업이 경쟁력을 상실해가자 점차 못사는 나라가 되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실업자는 늘어났으며 외국자본은 떠나갔다. 에바는 점차 몸이 말라갔다. 그의 몸에 폐암이 걸렸기 때문이다. 페론의 부인이었지만 그는 페론과 늘 방을 따로 썼다한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시에 스스로 곡을 부쳐 대통령궁 베란다에서 국민들앞에 노래를 불렀으나 호응이 크지 못했다. 이번에는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다시 곡을 부쳐 국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노래하다 쓰러져 죽었다. 그녀의 나이 55세였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노동자와 국민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 혁명군이 대통령궁에 함포사격을 하겠다하자 페론은 스스로 하야했다. 처음 그는 파라과이 대사로 나갔으나 얼마후 스페인으로 망명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스페인 여자 이사벨과 재혼을 하였다. 망명을 할 때 그는 에바의 관을 몰래 이태리로 옮겨갔다. 17년후인 1962년 군사쿠테타로 프론티지 정권이 실각하자 페론의 향수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를 다시 부른다. 국민들의 사랑을 과신한 페론은 정권에 눈이 어두워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부인 이사벨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시킨다. 그러나 부인까지 부통령 후보로 등록한 그의 인기는 높지 못했다. 우리가 봐도 황당한 일이다. 당황한 페론은 이태리에서 에바의 관을 옮겨와 유세장마다 에바의 관을 앞세우고 다녔다. 에바의 인기는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에 살아있어 페론과 그의 부인은 대통령과 부통령에 모두 당선되었다. 죽은 에바가 페론을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시켜준 것이다. 그녀는 진정 아르헨티나의 여신이 된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페론은 10개월만에 심장마비로 죽자 그의 부인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경륜이 부족하고 통치력도 없었던 이사벨은 중앙은행의 모든 금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그녀의 정권은 또 쿠테타로 무너졌으며 아르헨티나는 끝없는 군사정권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나라는 망해도 에비타 만큼은 영원한 신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그를 모델로 하여 미국에서 만든 영화에 마돈나 같은 스캔들이 많은 여자가 주연을 했다고 하여 신성모독(?)으로 전세계에 상영된 영화가 본고장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상영조차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얼마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에노스 시내관광은 라플라다 강부터 시작하였다. 이 강은 하구의 강폭이 48㎞나 되는 세계에서 제일 넓은 강이다. 강폭이 넓다보니 말이 강이지 바다와 분간이 되지않고 다만 약간의 파도를 타고 넘실데며 흐르는 물결을 봐서 강인가 싶었다. 강너머 저쪽은 우루과이 땅이라는데 강위에는 요트놀이 를 하는 사람들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몹시 평화스러워 보였다. 이 강에는 고기 또한 많이 살아 낚시를 던지면 너무 물려서 재미가 없을 정도라는데 보통 조기나 광어는 서너가족이 가면 500마리정도는 넉근히 잡고 잉어는 1미터짜리도 심심찮게 잡힌다니 물반 고기반인 셈이다. 라플라다 강 연안에는 1700년대에 지은 세관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최근 이 지역에 개발 붐이 일어나 땅값이 제일 비싼 곳이 되었단다. 다음으로 찾아본 곳이 탱고의 고향이며 애수의 항구마을인 보카지구다. 보카는 지금의 북항이 생기기 전만해도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항구였다. 유럽에서 온 배들은 이민 온 사람들과 화물들을 모두 이 항구에 내려놓았으며 항구는 언제나 꿈을 찾아 온 많은 유럽 사람들로 붐볐다. 인근에 있는 조선소나 도축공장에서 일 하는 사람들이나 선원들, 갈 곳 없는 이민자들이 이렇게 몰려들자 싸구려 술집이나 여자들도 몰려 들었으며 이들은 피로한 이민생활을 술과 춤으로 달랬다. 지금의 보카는 옛날 이층집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골목길에는 그림장사들이나 악사, 판토마임들이 늘어서서 관광객의 눈길을 끌며 결코 비루하지않게 동전 몇푼씩을 벌고 있다. 다음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중심지라고 말할 수 있는 몬세라트 지구를 둘러보았다. 1810년 5월 25일 아르헨티나 태생의 크리오조들이 스페인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기위해 일으켰던 5월혁명 광장에는 5월의 탑이 우뚝 솟아있었으며, 광장에 있는 이 나라 국기창안자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 앞에서는 매일 대통령관저 호위 병들이 교대식을 행하고 있었다. 5월의 탑 뒤로는 분홍색 건물인 탓에 카사 로사다 라고 불리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873년부터 94년에 걸쳐 건설된 대통령궁은 초창기부터 건물색깔을 핑크색으로 칠해 왔기 때문에 핑크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건물 2층 베란다에서 연설하기를 즐겨했던 에바를 보기위해 이 나라 국민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한다. 말이 대통령궁이지 경호원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궁 옆에 있는 카빌로는 1810년 5월 25일 독립선포를 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 건물 2층은 현재 5월혁명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당시의 집기등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대통령궁 인근에 있는 대성당 메트로 폴리타나에는 남미 해방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관이있는 문 입구에 근무하는 호위병의 군복은 마틴장군시절의 독립군 복장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란다. 5월대로의 서쪽 끝 즉 대통령구 맞은편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1906년에 완공된 그레코로만형의 위엄있는 건물이다. 의사당건물 앞에는 아름다운 기념비와 분수대가 있어 일반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기념비 옆에는 무슨 탄원이 있는지 데모하는 사람들이 호소문을 임시 텐트앞에 붙여 놓고는 숙식을 그곳에서 하는 것 같이 보냈다. 점심시간에 우리 대사님의 말을 들으니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인구중 이태리계 인구가 45%나 되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이 사는 방식은 『이태리 사람들이 스페인 말을 쓰면서 영국사람 사고로 행동하고 불란서 사람처럼 살려고 한다』고 보면 틀림 없다고 한다. 이 나라 현실을 잘 표현한 말인 것 같다. 오늘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태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이태리 대사관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르헨티나의 오늘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수 있을 것 같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점심은 고기요리로 했는데 이 나라에는 소한마리 값이 200불정도 밖에 가지 않기 때문에 고기 각 부위를 골고루 잘 구워서 손님들이 원하는데로 빚어주는데 갈비, 등심, 간, 염통, 곱창, 소세지등 입맛에 맞는데로 맛볼 수 있었다. 그러자니 점심시간이 길어 보통 두세시간은 먹고 마신다. 오후에는 빨레르모 공원과 에비타의 묘지가 있는 레콜레타 공원묘지를 둘러보았다. 빨레르모 공원에 가는길에 들려본 아트 뮤지움은 중세유럽 대가들의 수집 보고였다. 옛날 이 나라가 세계5대 부강국이었던 시절 사모아둔 고흐, 마네, 드가, 피싸로, 고갱, 세잔느, 모네, 고야, 피카소등의 작품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어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공원이 가장 많은 나라다. 우리가 찾아본 빨레르모 공원도 그 면적이 여의도 두배 규모로 그안에 식물원, 동물원, 골프장, 국내공항까지 들어 있었다. 레골레타 묘지는 이 나라 상류층 특히 부유층 인사들의 묘역이다. 죽은 사람들의 최고급 주택지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사방 150미터로 이안에 모두 6400개의 납골당이 있는데 그 중 70개 묘는 이나라 문화재로 지정 되어있었으며 역대 대통령 13분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납골당은 여러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모두가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관을 그대로 안치 해 두고 있어 대리석 문틈으로 관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어떤 관은 오래되어서 낡을데로 낡은것도 있었다. 레골레타 묘역이 유명한 것은 갑부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싼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비타의 묘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에바의 묘는 페론 대통령과 같이 있지 않고 그녀의 가족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는데 참배객들의 행열이 끊일 날이 없으며 늘 이들이 두고간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아직도 인기를 잃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튿날은 주일이라 이곳에 시무하는 최광언 목사님의 제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았다. 최목사는 나와 고등학교때부터 막역한 친구로 서울에서 목회생활을 하다가 10여년전 당시 교인수가 오륙십명 밖에 되지 않던 지금의 교회에 부임하여 현재는 등록 교인이 1500명이나 되는 큰 교회로 키운 하나님의 일꾼이다. 예배시간이 되어 몰려드는 우리 동포들을 볼 때 이들 앞에 숙연한 마음마져 들었다. 전성기 시절의 이곳 교민수는 3만명이 넘었으나 현재는 경기가 안좋아 미국, 멕시코 등지로 모두 떠나고 2만명 정도가 산다는데 이들중 80%가 봉제계통에 종사한다. 이 나라의 봉제산업은 우리 교민들이 확실히 잡고 있다. 이 날 예배는 뜨겁고 은혜로웠으며 특히 나는 미리 소천한 동생(故 강현석집사)과 함께 이곳에서 예배를 본 것 같은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였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실에 내려가 교회가 준비한 점심을 나누어 먹는데 모두가 한가족 같이 오손도손 하였다. 점심이 끝나고 최목사 내외와 함께 이곳에서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교회 교육관을 둘러 보러 갔다. 이십만평 규모의 초원에 예쁘게 세운 교육관과 숙박시설, 수영장과 놀이터는 우리교민들의 기도처요 휴식처로서 너무나 훌륭하였으며 이 모든 것을 내친구인 최목사가 일구어 놓았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저녁에는 라벤타나라는 식당식 극장에 가서 이 나라의 상징중의 하나인 탱고쇼를 관람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식당안은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사회자는 이 자리에 참석한 각국의 관광객들에게 각기 나라말로 인사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탱고의 원류는 쿠바의 음악 하바넬라가 선원들에 의해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로 전해져 그 지역 풍토에 맞게 변화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탱고곡 라쿰파르시스타의 작곡자는 우루과이 사람이다. 그래서 우루과이 탱고도 유명하기는하나 이곳 사람들은 역시 한수 아래로 본다. 춤에 대해 문외한인 우리 입장에서 본 그날의 탱고춤은 곡예에 가깝다 할까 너무나 정열적이고 경쾌하였다. 특히 이날 밴드팀의 일원으로 나온 82세의 노인의 아코디온 반주는 너무나 진지하다 못해 엄숙해 보였으며 탱고를 너무 사랑해 무대에서 연주를 하다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은 차라리 성스러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