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인/한국산업은행 감사
10월 9일 월요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낮 12시 반에 이과수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이과수 지역은 아열대 밀림지대 였으며, 여러곳에서 모여든 물줄기들이 폭포에 가까워지면서 유속이 점점 빨라지다가 폭포를 이루었다. 이 일대가 밀림지대이다보니 폭포가 발견되고 또 개발된지도 그리오래지 않다. 이과수는 인디오말로 "물이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1916년 브라질의 산토 도문도라는 조종사에 의해 처음 알려졌으며, 그 뒤 1929년에 가서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과수 지역은 상파울로에서 1600㎞,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1800㎞의 오지에 위치한 점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75년 미션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과수 지역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음 하였다. 이과수 공항에서 폭포까지는 버스로 40분정도 걸리는데 공항에 내려 시내쪽으로 갈수록 우르릉 하는 폭포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가이드가 안내한 중국식당에 들렸더니 우리 김치와 고추장을 내놓는다. 한국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오는지 준비에 감사했다. 식사 후 브라질 쪽의 부르봉 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 관광에 나섰다. 국립공원 안에 있는 유일한 호텔인 카타라다스 호텔까지 버스로 가서 전망대로 나서니 대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황토물 보다 진한 다갈색의 광대한 폭포들의 집단이 눈앞에 전개되는게 아닌가. 그때의 감동어린 흥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르릉 쾅쾅 대며 웅장하게 터져나오는 힘찬 물소리와 태양의 위치와 밝기에 따라 색채가 수시로 변하는 폭포의 표정, 300여개나 되는 폭포가 한데 어우러져 무지개를 이루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으며 이 먼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과수 폭포는 폭이 5㎞, 최고낙차가 100m가 넘는 세계 제일의 폭포이며 나이아가라 폭포가 단일 폭포로 세계 제일의 웅장한 맛이 있다면 이과수 폭포는 여러 개의 폭포가 한데 어우러져 심포니를 연주하는 다양하면서도 웅장한 폭포로서 단연 으뜸일 것이다. 공원 산책로를 끼고 걸어가면서 보는 형형색색의 이과수 폭포의 모습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보는이로 하여금 감동과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마침 햇빛이 구름에 가려 서쪽하늘에 노을이 비치듯 하늘은 붉었다 푸르럿다 하는 신선이 사는 동네가 이런가 싶은 생각마져 들었다. 이과수 폭포가 있는 공원은 "세계 생태보전지구"로 지정되 유엔이 관리하고 있으며 공원안에는 표범과 푸마같은 희귀 동물들도 살고 있다한다. 이 광활한 공원의 늪 사이로 수로가 수없이 나있고 이 수로가 모여 낭떠러지에 가서 수백개의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쪽의 이과수 폭포를 대략 둘러본 일행은 짚차를 타고 정글속을 들어가 보았다. 이곳은 생태보전 지역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걸어다닐 수 없게 되있다. 정글이라지만 특별히 동물들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고 원시열대림 사이로 좁은 길을 차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다. 짚차 여행이 끝나는 지점에서 선착장으로 내려가면 고속 수상제트보트를 타고 폭포에 다가가는 여행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선착장에서 물에 젖으면 안 될 중요한 짐은 맡겨놓고 비옷을 받아 입은 다음 수상보트에 올라 벨트를 메고 나면 보트가 전속력으로 폭포쪽으로 돌진하다가 갑자기 급회전을 하는 기교를 부리는데 물보라와 고속의 공포 때문에 모두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 아~ 하면서 고함만 질러덴다. 이 보트는 폭포 가까이에서 잠시 멈추는데 폭포 바로 아래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위쪽을 바라보는 재미는 이 관광코스의 극치다. 이윽고 선착장에 돌아오면 모두 물에 젖은 생쥐가 되있다. 이 날 저녁은 민속음악을 공연하는 극장식 식당에서 브라질 특유의 슈라스코 요리를 맛보며 공연을 즐겼다. 슈라스코는 소고기를 각 부위별로 구워서 골고루 맛보게 해주는 코스이며 고기값이 싸기 때문에 큰돈을 들이지 않고 각 부위의 고기를 골고루 맞볼 수 있어 아주 좋은 메뉴다. 이 날 공연장에는 일본, 한국, 독일, 아르젠티나, 파라과이, 영국 등에서 온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멕시코 민속춤과 아르젠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춤 등 남미 각국의 민속춤과 음악을 공연했는데 너무 훌륭한 프로였다. 이날밤은 밤새 마른 번개가 우르르 꽝 치면서 열대성 폭우가 내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지만 참으로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10월 10일 화요일 아침에 비가 간간히 내렸다. 오늘은 아르젠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를 보는 날이다. 어제 아르젠티나 쪽에서 브라질 쪽으로 입국 할 때는 절차가 수월했는데 오늘 아르젠티나 입국은 몹시 까다로웠다. 이과수 폭포가 두나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 곳 라플라타 강위에 놓인 다리 중간지점이 국경선이다. 어제 우리가 묵은 포스두 이과수시는 아르젠티나, 파라과이 두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브라질의 도시이다. 이과수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아르젠티나의 푸에르토 이과수시, 파라나 강을 사이에 두고 우정의 다리로 연결된 도시는 파라과이의 시우다 델에스테인데 이곳은 남미의 홍콩으로서 면세도시로 유명하다. 이과수 시에서 파라과이 쪽을 바라보면 세계 최대 출력을 자랑하는 이타이푸 수력 발전소가 있다. 197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4년에 완공된 이댐 건설에 모두 200억불이 들었는데 190억불은 브라질 중앙은행이 보증하고 10억불만 파라과이 측이 투자하여 양국이 공동 운영하고 있다. 실지로 전력은 파라과이가 5%만 사용하고 나머지 95%는 브라질측이 사용한다. 이 댐은 시간당 출력 70만㎾의 발전기 18개를 모두 작동시키면 1260만㎾의 발전이 가능해 960만㎾의 아스완 댐 보다 훨씬 규모가 큰 발전소이다. 이 댐을 건설할 때 중국인 노동력을 많이 썼는데 이들중 대부분이 공사가 끝나고 이곳에 남아 남미의 홍콩인 시우다 델에스테 시를 건설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건설중인 삼혐댐의 기술진들도 이곳에 와서 연수를 받고 갔단다. 오늘날 약소국인 파라과이는 한때 남미 최강대국 이였다한다. 1888년 남미전쟁 당시만해도 태평양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커다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강대국답게 이웃나라인 우루과이와 아르젠티나, 브라질의 내정간섭까지 하였다. 참다못한 이들 3개 나라는 연합군을 형성하여 미인계를 이용해 집권층들이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수도인 아순시온까지 진군하여 남자는 거의 다 죽여서 살아남은 인구가 25만 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쟁후 남자가 워낙 귀해 여자 한명이 남편 넷을 거느리고 사는 여인 천국이 되었다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로 30분 정도 가니 폭포를 구경할 수 있는 산책로 기점인 푸에르토 카노아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브라질 쪽의 이과수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은 브라질 쪽에서 바라보는 경관보다 훨씬 아기자기 한 맛이 덜 하였다. 아르젠티나 쪽 폭포의 압권은 단연 악마의 목구멍이다. 이과수 강에서 보트를 타고 인공으로 가설된 선착장에 내려 강위에 가설해 놓은 다리위로 폭포 쪽으로 10분정도 걸어가니 악마의 목구멍이 나타났는데 휑하니 뚫린 구멍속으로 거대한 물기둥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과연 장관이었으며 구경하는 나도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 때문에 공포감마져 들었다. 옛날 인디오들이 보트를 타고가다 이곳에 오면 물살이 빨라지면서 빨려 들어갔기 때문에 악마의 목구멍이라 이름 부쳤다한다. 이과수 폭포에서 미션이란 영화를 촬영한 이유는 이곳 인근에 있는 산 이그나쇼 시에서 10만명의 인디오들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들의 통치 이념은 기독교 선교였다. 처음 볼리바르 장군이 통치할 시절만해도 개종을 하면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미를 평정하여 영웅이 된 산마르틴 장군은 개종여부와 상관없이 인디오 인종 청소에 나섰다.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환난을 피하기 위해 정글로 정글로 도망온 인디오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산 이그나쇼 지역에 10만명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곳에도 스페인 군인들이 나타나 인디오들을 잡아다 죽이기 시작하자 이곳을 지도하던 주교 신부가 스페인 군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에 분노한 총독부 소속 군인들은 산 이그나쇼 시를 포위해 10만 인디오 전부를 몰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과수 폭포를 배경으로 쫗고 쫗기는 이들의 저항과 죽음이 영화 에 잘 묘사 되있다. 정복자에 저항한 주교 신부님도 이들에게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인디오들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슴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