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룡사(大龍寺) 분위기가 밝지 못하다. 주지(住持)가 새로 바뀌면서부터 은연중 있어 온 일인 듯 싶은데 최근에 그 도가 심해졌다. 문제인즉 그전 신도들 중 작당한 몇몇이서 잿밥을 탐하여 새 주지인 월하스님의 기도(祈禱)를 괴롭히는 것이다. 월하스님은 그 고통을 참고 또 참아내느라 무척 힘겨워한다. 그래서 그의 기도가 요즘 더욱 극진하고 간절하다. 그의 끝간데 없는 감내의 기도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찾고 또 무엇을 얻는가? 합장하옵나니, 저 가엾은 중생들을 거두어 주소서. 사람은 세상살이에 과연 얼마만한 재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나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은 한도가 있는 게 아니더이까. 그 나머지는 이웃이 함께 나눠 가져야 할 세상의 공유물이니까요. 남보다 적게 가지면서도 삶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로 살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욕망으로 얻는 평소의 행위, 즉 업보(業報)를 마음에 지닌 채 세상을 뜨고, 다음에 그 행위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오는 윤회(輪廻)를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윤회의 근본요인을 불교에서 탐욕이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기를 쓰고 차지하려하고, 또 그것을 남과 견주며 항상 제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분수 밖의 욕심이라는 말이지요. 가엾은 중생이여, 이제 무엇을 더 원하나이까. 얼마만큼 더 가지면 만족할 수 있겠나이까.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를 고개 숙여 내려다보소서. 가을의 낙엽처럼 나이가 하나 둘 당신에게서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더 욕심을 부리지 않고도 잘살 수 있지 않겠나이까. 사람이 어디 천년만년 사는 것이더이까. 단 한번뿐인 내 삶을 남고 견주기 때문에 허탈과 분노가 생긴다고 왜 깨닫지 못하나이까. 행복이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살아지느냐 하는 것이외다. 모름지기 사람은 욕망에 따라 살아서는 대접받지 못함을 이제라도 깨달으소서. 가엾은 중생이여, 당신은 하나를 가지면 열을 원하고, 열을 얻으면 또 백을 욕심내니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분수만큼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탐욕일 뿐 진정으로 가진 것이 아니랍니다.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나이다.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욕망을 다 채울 수 없다. 욕망에는 짧은 쾌락에 많은 고통이 따른다"고 말입니다. 옳은 말씀이지요. 눈앞의 것을 다 내 것이라 집착하고 또 남에게 뺏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대룡사는 당신 것도 내 것도 아니외다. 당신이나 나나 한때 맡아서 지닐 뿐이외다. 나 자신도 영원히 살아지는 목숨이 아닌데 내가 어찌 내 것이라 우기겠나이까. 그전에는 당신이 맡아왔고, 지금은 내가 맡아 운영할 뿐 또 내일은 그 누군가가 맡아서 이끌어가게 될 것이외다. 합장하옵나니, 중생이여 어서 불심(佛心)을 되찾으소서. 그만 이제 진정한 불자(佛子)가 되소서. 월하스님의 절절한 기도를 지켜보고 있자니 텃밭의 솔바람 향기에 절로 취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찾고 또 찾지 않는 것을 뜻밖에 얻는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서 생기는 일들은 무엇이든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사칠 주인이 바뀐 시점에서 전자(前者)는 전자대로, 후자(後者)는 그 나름으로 뜻을 내세울 테니까. 살아가고 있는지를. 흔히 수행의 길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항상 내가 서있는 자리에 마음을 모으며 새롭게 나를 찾으리라. 맑은 햇살이 온 산자락에 푸근하게 내린다. 아침저녁으로 듣는 관음전(觀音殿)의 목탁소리도 여느 때보다 또랑또랑하다. 대나무숲이며 새소리며 들꽃 쓰거늘 우리가 인간임에랴. 대룡사 뜨락에 어서 눈부신 햇살이 마냥 쏟아지길 합장할 따름이다. 월하스님에게서 가끔 듣는 법문이 있다. "실수가 주먹만하면 주먹만한 성공을 거두고, 실수가 태산만하면 태산만한 성공을 거둘 것이요, 실수가 허공만 하면 그 성공 또한 허공만 하리라"고. 아무렴 재물을 탐욕의 수단으로 쓰면 그 재물에 곰팡이가 슬어 빛이 바랜다는 말이다. 그게 곧 세상사는 이치가 아닐까. 전에 없이 오늘은 새벽 세 시에 깨었다. 그래서 한 시간의 묵도(默禱) 속에서 월하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영혼이 내 가슴속 깊이 스몄는지 이 글을 단숨에 써낼 수 있었다. 한동안 보시(布施)를 못하고 지냈는데 이 글로 대신할 수 있을까. 여느 날보다 마음이 개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