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석 인
10월 10일(화) 오후 세시 반 비행기로 이과수 공항을 출발하여 여섯시반에 리우 데 자네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리우는 포르투갈어로 강 이라는 뜻인데 이 곳 사람들은 히오라고 발음한다. 1501년 1월 이곳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강의 입구로 착각하여 일월의 강이란 뜻으로 리우 데 자네이로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쓴다. 1960년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옮겨간 후 리우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긴했지만 아직도 상파울로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로서, |
리우데자네이루의 전경 |
또 천혜의 자연경관과 쾌적한 기후, 편안한 인정미로 인해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
남아메리카 대륙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은 넓은 대륙에 걸맞게 인종도 다양해 백인계가 50%, 혼혈계가 30%가 넘고 기타가 흑인 및 황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라질은 옛날부터 인디오, 백인, 흑인이 혼혈을 거듭한데다 아랍인, 중국인등 다수의 인종을 이민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혼혈 천국이다. 이중에는 반공포로로 넘어간 한국계 50명의 피도 한몫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종차별이 전혀없는 나라이다. 각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의 직업군도 각양각색이다. 가장 많은 포르투갈계 사람들은 농장주가 많고 스페인계 사람들은 유흥음식업에 주로 종사하며, 독일계는 엔지니어, 미국계는 유통업에, 유대계는 교수, 경제인들이 많고 일본계는 농업, 한국계 이민자들은 50가구정도 사는데 전부 옷장사를 한다. 특히 일본사람들은 이민역사가 100년이나 되며 200만 인구에 일본국토 3배 면적의 땅을 부쳐 이나라 야채시장을 완전히 잡고 있으며 성실하고 근면한 근성 때문에 한국사람들의 주가까지 따라 올라간단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령이 된 것은 1500년 포르투갈사람 베드로 카브라알 제독이 풍랑을 만나 현재의 포르투 세구로 부근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영토로 선언하면서 부터다. 이들은 원주민들이 큰나무에서 붉은색의 염료를 채취해 몸에 바르는 것을 보고 염료를 채취해 돌아갔는데 그 나무 이름인 브라질이 오늘날 이나라의 국호가 되었다. 이 후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되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왔으며 총독 정치도 활발해 졌다. 1807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입하자 왕실이 브라질로 일시 피난을 했는데 나폴레옹이 물런간 뒤에 부왕 조앙 6세는 귀국했지만 돈 뻬드로 황태자는 이곳에 남아 브라질을 통치 하였으며 이때 일군들을 확보하기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대거 수입했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은 독립하여 돈 뻬드로 1세가 초대 왕으로 즉위하여 그의 아들때까지 60여년간 왕정이 계속되었다. 1889년 무혈 쿠테타가 일어나 돈 뻬드로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지금까지 공화제를 유지하고 있다. 돈 뻬드로 2세때 이사벨 공주의 제언으로 흑인노예들은 해방되었으며 노예해방으로 인해 사회는 혼란해졌다. 브라질 정부는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줄 상징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결과 1922년 국민들로 부터 성금을 모아 리우 전체를 굽어 볼수 있는 코르도바 언덕에 예수상을 건립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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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10미터인 코르도바 언덕은 원래 경관이 수려하여 왕족들의 놀이터로 쓰이던 곳이다. 브라질 정부는 독립 100주년이 되던 1922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얻어 높이 30미터 양팔의 길이가 28미터나 되는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예수상을 건립하여 1931년에 완공하였다. 수직 갱도를 이용한 전차를 타고 정상에 올라 예수상을 바라보면 그 웅장한 모습에 우선 압도된다. 코르도바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리우의 전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천혜의 굴곡을 따라 정열된 해변가 풍경이며 빵산의 자연스런 모습과 균형잡힌 도시의 배열이 볼수록 아름답다우스개 소리지만 이 아름다운 동산에 리우 사람들이 매일같이 올라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를 드렸다. |
이들의 기도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빵산을 만들어 주어 배불리 먹게 해주고 코파카파나 해변을 만들어 마음껏 뛰놀게 해 주었다. 그러길래 이나라 사람들은 남자를 낳으면 펠레같은 축구선수가 되게 하고 여자를 낳으면 삼바춤 덴서로 키우는게 소원이다. 이 나라에는 축구종주국 답게 수용인원 20만명을 자랑하는 마라칸나 축구 스타디움이 있다. 1950년 우리나라가 6.25동란으로 고생하던 시기에 제 4회 월드컵 경기를 위하여 세워진 이 스타디움은 최고 입장객 22만 5천명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브라질에는 700개가 넘는 축구팀이 있고 등록된 선수만도 1만 3천명이 넘는다. 어딜가도 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봐 우리나라 축구가 넘어야 할 벽이 무척 높은 것 같다. 점심은 코파카나 해변 근처에서 슈라스코로 배를 채우고 소화도 할겸 해변가로 나가봤다. 이날은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같은 기념일이라 그런지 청소년들이 몰려나와 공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코파 라고도 불리우는 이 해변은 약 3km정도의 활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해변 주위에는 유명호텔과 선물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안타까운 것은 리우에 하수정화 시설이 없어 오염된 물들이 이 해변으로 그대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식으로 방치하다 보면 몇 년 못가서 이 아름다운 해변도 오염이 될 것이 뻔하다. 리우에는 이곳 외에도 플라밍고, 우르카, 레메, 보타포고 해안등, 이루 손꼽을 수 없을만큼 좋은 해변을 가지고 있어 해변 귀한줄 모르느 것 같다. 코파카파나에서 바라보면 해면에서 럭비공처럼 불쑥 튀어나온 모양의 바위산이 있는데 여기말로 팡데아스카르라하여 줄여서 빵산이라고 부른다. 이 원추형 바위산은 표고가 396미터로서 아래 역에서 산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구름속으로 예수동산이 바라보이고, 코파카파나 해변의 물결 찰랑임까지 한눈에 들어오며 해질 무렵이나 야간에 바라보는 경치는 더욱 장관이다. 리우 관광의 별미중 하나는 역시 삼바춤 공연이다.삼바춤의 기원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 흑인들이 모로라는 슬럼지역에 몰려 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것이라 한다. 삼바춤이 보편화 되기 시작하자 리우시는 1940년대 부터 퍼레이드를 제도화 하기 시작하였고 각팀끼리 경연대회를 개최해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사순절의 4일전인 토요일 밤부터 수요일 새벽까지 4일 동안에 걸쳐 행해지는 이 광란의 축제에는 보통 10∼15개의 팀이 참여하며 이기간 동안 여러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는다. 우리가 관람한 프라타 포르마 극장식 식당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었으며 각 테이블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정도였다. 이 날 공연한 삼바춤은 세막으로 되어 있었는데 스토리 전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막이 오르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브라질의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포르투갈 침략자들이 이땅에 오기 전에는 이들이 마음놓고 자기신을 섬기며 먹고 마시고 춤추는 낙원에서 살았슴을 보여준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온 뒤로 카톨릭을 강제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살 것을 강요하자 원주민들은 반항하기 시작했으며 정복자들은 대안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냥해 와서 대체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잘 살게 해주겠다던 이들의 말은 거짓이었으며 흑인들은 비탄에 젖어 운다. 두번째 막이오르면 포르투갈 왕실이 1808년 브라질로 건너온다. 이당시노예들은 바투쿠라는 아프리카 춤을 추었는데 후일 앙골라 노예들이 들어오면서 삼바 앙골라라는 음악이 들어와 아프리카 춤과 삼바음악을 혼합한 형태의 삼바춤이 탄생된다. 둘째 막에서는 오늘날 삼바 카니발에서 보여주는 갖가지 화려한 춤의 양식을 골고루 보여주는데 각종의 깃털로 장식한 무희들의 화려한 분장과 엉덩이 흔들림은 보는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마지막 장에서는 브라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몇 사람을 등장시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데 흑인 노예해방을 위해 싸운 줌비라는 흑인 용사와 브라질 독립을 선언한 돈 뻬드로 왕자, 노예를 해방시켜 준 이사벨 공주, 브라질 음악의 독창성을 찾아준 치친하 곤자가라는 음악가 등이다. 춤 공연이 끝나면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출연했던 무희들이 한데 어우러져 삼바춤을 추는데 삼바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카니발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음미 해 볼수 있는 재미있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