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 기도처를 마련하고 천수천안관음보살님을 상단에 모셔 마침내 점안식을 봉행하였습니다. 마흔 네 살의 선택이지요. 이제는 닥치는 어떤 일들 앞에서도 나는 무력하다고, 무력하다고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수업이 겪은 시련은 내가 미처 배우지 못했던 교훈이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 이제는 그 어떤 어려움도 곤혹도 다 참아낼 수 있습니다. 진실과 대화할 것인가 환상을 계속할 것인가 선택의 길은 정해졌습니다. 고통은 환상이되 기쁨은 실체요 고통은 속임수되 기쁨은 진실이라고. 내 유일한 선택의 길이랍니다. 이 봄에 겨우 씨를 심었지요. 가을걷이하자면 땡볕을 참아내야지요. 장마도 홍수도 견디어야 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할 것입니다. 관음전 뜨락이 밝고 환합니다. 목탁소리도 한결 밝게 들립니다.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고통과 기쁨 사이에서 마침내 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月下의 詩 마흔 네 살의 선택 全文 마흔 네 살의 선택, 이 타이틀은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앞에 내세운 시편도 내 것이 아니다. 얼마전부터 몇 회에 걸쳐 써 온 월하(月下) 스님의 이야기로, 이번에도 소잿거리가 되기에 쓰게 되었다. 월하 스님은 올해로 마흔 네 살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의 시에서 보듯이, 그가 지난 4월 22일에 자신의 기도처를 새로이 단장하고 천수천안관음보살(千手千眼觀音菩薩)을 모신 것이다. 그 자신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모름지기 대룡사(大龍寺)의 어엿한 주지로서 이제 자신의 길을 값지게 걸어갈 일만 남았다. 일찍이 공자는 "나이 사십이 되어 남의 미움을 산다면 인생의 마지막"이라 했고, 괴테도 "사람은 장년(壯年)의 나이에 회의론자(懷疑論者)가 된다"고 했다. 또 하버트의 말을 빌리면 "나이 스물에 아름답지 못하고, 서른에 강하지 못하고, 마흔에 유복하지 못하고, 쉰에 현명하지 못하면 그는 아름다울 수도 강할 수도 부(富)할 수도 없다"고도 했다. 이 선인들의 말인즉 한마디로 인생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선택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신중히 되돌아볼 때가 곧 장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하 스님이야말로 마흔 네 살에 목표가 뚜렷하고 할 일이 선택되어졌으니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나이 사십대면 전생(全生)에서 가장 혈기왕성하여 한창 활동할 시기이다. 이제 그는 앞으로 닥치는 어떤 일에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인생을 값지게 엮어 나갈 것이다. 월하, 그는 자신의 그 다짐을 작품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고통과 기쁨 사이에서 가졌던 고민을 훌훌 털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했다. 그동안 겪은 고통은 자신이 미처 배우지 못했던 교훈이 문득문득 나타난 잠시의 현상일 뿐이었다고. 그리고 그 고통은 키를 손에 쥐려고 애쓰는 자신을 환상 속으로 꾀어내던 속임수에 불과했다고. 그래서 깨어 보니 진실만이 실체(實體)요 기쁨이라고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하 스님은 자신의 그 선택을 겨우 봄갈이일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그에게 앞으로 부딪혀 올 일들이 그동안보다도 더 많을 테니까. 그의 말대로 이제 밭에 뿌렸으니 뙤약볕도 장마도 참아내야 하고, 홍수도 만날 수 있다. 이웃과도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욱 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가 환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택했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변하지 않는다. 진실이란 사람에 따라서 또 세상에 따라서 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문학이 그렇지 아니한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란 폭풍처럼 터뜨리고 울부짖고 하여 가슴속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는 감정이기보다는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무르익히고 곰새겨서 그것이 향기와 빛깔로 드러날 때 진실된 작품이 출산되어지니까. 또 가끔은 미지근한 듯하면서도 사실은 열기(熱氣)에 시달리는 고통의 긴긴 세월을 참아내고서야 참사랑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듯이 말이다. 잠시 돌이켜보자. 사람들이 누구나 최선의 노력으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값지게 산다고 뽐낼 수 있는 자 과연 몇이나 될까? 장년의 시대에 한 사찰의 주지로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발하며, 깨달음을 이뤄가는 월하 스님이 참으로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월하스님, 「화엄경」에서 이런 법문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지혜의 꽃과 열매를 맺는다"고. 이는 중생이 없으면 보살은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논리가 아닙니까? 불교대학의 수재였던 당신께 감히 주제넘은 주문같습니다만, 기왕에 선택하셨으니 당신의 길에 원(願)을 크게 세우십시오. 모름지기 살아있는 부처가 되겠노라고말입니다. 아무렴 제 말이 아니라 경전에서 부처님의 입으로 전해진 말씀을 옮겨 보았습니다. 허물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