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너는 알리라 오용수 大龍寺 텃밭에 사랑의 빛이 흐릅니다. 그 모서리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詩를 쓸 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내 가슴에서 열정이 식지 않고 나날이 뜨겁게 타오름은 오직 그대 사랑이 미더워서입니다. 그뿐입니까, 어느 날 아주 먼길을 떠나게 될 때 머리 숙이고 지나온 흔적을 더듬다 눈물 흘릴지라도 그대의 同行으로 나는 행복할 따름입니다. 행복이란 짚어 보니 먼데 있지 않더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삶이란 그게 비록 한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행복을 대신 할 것이 어디에도 또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 사랑은 佛陀의 緣이 닿은 작은 빛입니다. 그 빛이 觀音殿을 밝히지 않으리까. 언제부턴가 여생(餘生)을 산 속에서 조용히 보내고 싶다던 생각이 끝내 산을 찾아왔다. 좀더 분명히 하자면 산을 찾아왔다기보다 절(寺院)에 몸을 기대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날 아침(1월 31일) 맥문학 사무실에서 소설가 김진희(金眞熙)선생과 우연찮게, 정말 우연찮게 나의 산행(山行) 얘기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열차를 탔고, 마침내 이곳 대룡사(大龍寺)에 연(緣)이 닿았던 것이다. 그러고서 보름 뒤, 30여 년의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산문(山門)에 들었는데, 그게 2월 15일 해질녘이었으니 나의 산거일기(山居日記)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 엊그제 같은 일이 어느덧 산 속에 넉 달째 접어들었다. 산이란 무심코 바라보면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가슴을 활짝 젖히고 올려다보면 그 산의 흡인력에 빨려들어 내 자신이 문득 산이 되고 만다. 그렇듯 산은 그 품이 포근하고 아늑하다. 이 대룡산이 나를 그렇게 안아 준다. 물론 사람은 어디서 살든 자기 식대로 살기 마련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도시공해를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우연찮게, 정말 우연찮게 그 기회를 맞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른 데는 별로 오래 머물러 보지 않아서 비교할 순 없지만, 이곳 대룡산의 맑은 공기와 물, 흙과 바람이 내 속을 채워 주기에 충분하니까. 다만 당초 바랐던 생각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삶의 궤도를 수정하는 일이었다. 산거일기를 쓰게 되면서부터 수행(修行)의 길을 함께 걷게 된 것이다. 출가(出家)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머뭇거리거나 한눈 팔지 않고 마음을 기울이고 싶다. 여생을 그렇게 보낼 작정이다. 텃밭에 이는 솔바람이 내 그런 마음을 아는지 오늘따라 코끝을 오래오래 간지럽힌다. 수행하려거든 늘 깨어 있으라는 깨침이라 여겨졌다. 그렇다. 재물이나 명예 같은 세상의 일들은 노력하는 만큼 얻을 수 있지만 수행자의 도량(道揚)은 생계의 수단일 수 없는 것이니까. 수행자는 늘 빈손이어야 구도(求道)의 마음이 한층 깊어지기에 그러리라. 수행자는 가난할수록 부자(富者)요, 텅 빈 마음에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자면 온 세상이 잠드는 시간에도 불침번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할 수밖에. 잔설(殘雪)이 드문드문하던 초봄에 이곳에 왔는데 요즘 햇볕이 어지간히 따가워졌다. 월하스님의 바쁜 나날 속에서도 그와 가까이 지낸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스님이 들려주던 많은 얘기들이 요즘에 문득문득 내 마음을 맑혀 준다. 그중에도 가장 또렷한 것이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사세요" 하던 말이다. 수행자의 삶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를 최선으로 살 뿐이라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거기서 영원한 젊음이 싹트고 꽃이 피어 마침내 깨달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아무렴 그럴 것이다. 시간이란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자꾸만 떠나는 것이니 이를테면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이다. 그러니 사는 동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일 수 없지 않은가. 늘 시간을 아끼며 무가치한 일에 내 삶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바람아 너는 알지 않느냐, 내가 지난 세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흔히 수행의 길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항상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마음을 모으며 새롭게 나를 찾으리라. 맑은 햇살이 온 산자락에 푸근하게 내린다. 아침저녁으로 듣는 관음전(觀音殿)의 목탁소리도 여느 때보다 또랑또랑하다. 대나무숲이며 새소리며 들꽃의 향기며 텃밭에 살아 숨쉬는 것들도 생기발랄하다. 들숨과 날숨이, 하늘과 땅이, 그리고 햇볕과 바람, 음과 양이 한데 어우러져 사랑의 빛을 발한다. 이 모두가 예술의 본질이요 불타(佛陀)의 미소가 아니랴. 어제는 법당의 유리창을 물걸레로 말끔히 닦아냈다. 창은 바로 그 집의 눈이 아닌가. 내일은 내 방의 도배를 손수 하고, 창도 환하게 닦을 것이다. 방을 청소하면서 모아지는 낟알들을 헌식대 위에 올려놓고 텃밭 모퉁이엔 양배추와 고추모도 심으리라. 그러고 나서 불 밝혀진 창 아래서 책을 읽고 시(詩)도 쓰리라. 바람아, 너는 알리라. 내게 아직은 열정이 식지 않아서 행복하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