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국 왕궁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는 주궁전인 버킹검 궁이나 윈저성을 연상하지만 런던 근교에 있는 햄튼궁전도 영국 역사상 200년이상 궁전으로 사용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은 비록 왕궁으로 사용되지 않고 일반에게 공개되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오백년전인 핸리 8세 제위때만해도 영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궁전이었다. 영국 특유의 붉은 벽돌만으로 지어진 이 궁전에서는 비록 곰털모자에 붉은색 상의를 입은 근위병들이나 황금빛 투구를 쓴 기마병들이 나타나 위병교대식 같은 거창한 행사는 보여주않지만 중세 영국 왕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정원을 산책할 수 있는 좋은 관광 명소다. 영국역사에서 아일랜드를 토벌하고 스코트랜드를 지배하여 튜도로 왕조를 확립하였으며,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하고 이 중 두명의 왕비를 처형했던 것으로 유명한 핸리 8세의 궁전으로 더욱 알려진 햄튼 궁전터의 원래 소유자는 당시 요크 추기경이었던 토마스 울시 것이었다. 1515년 수석장관에 임명된 울시는 이곳에 자기 신분에 걸맞는 침실과 키친, 코트야드, 정원까지 갖춘 저택을 지었으며 나중에는 핸리 8세와 왕비, 공주까지도 묵어 갈 수 있는 호화로운 시설을 증축하였다. 주변 풍광이 수려하고 사냥터까지 갖춘 이 저택에 핸리 8세는 가끔 묵어갔다. 1528년 핸리 8세가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케더린과 이혼을 하게 되었으며 당시만해도 왕이 이혼을 하려면 교황의 허가를 받아했는데 울시 추기경이 이일을 매끄럽게 처리를 하지 못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핸리 8세는 교황과 충돌하여 영국교회의 독립을 꾀해 1534년 수장령을 발포,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수도원을 폐쇄하였으며 그 재산도 몰수했다. 원래 그는 착실한 카도릭 교도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판해 교황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다. 이때 핸리 8세는 울시로 하여금 햄튼 영지의 소유권을 왕실에 양도하도록 압력을 넣어 그 소유권이 왕실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10년간 핸리 8세는 궁전을 본격적으로 건축하여 당대 최고의 궁전을 만들었는데 당시 돈으로 비용이 62,000 파운드나 들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1800만 파운드(330억원 )이나 되는 큰 돈이니 얼마나 공을들여 호화롭게 지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또 여섯 번씩이나 결혼을 할때마다 왕비를 위해 사치스러운 방을 새로 꾸미거나 수리를 했다. 그의 영정을 보면 키가 그리 크지않고 턱수염이 넓으며 몸이 비대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젊었을때는 유럽에서 가장 핸섬한 왕자였다한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케더린과는 20여년간 같이 살다가 이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천일의 앤"이란 영화로 유명한 앤불린이었다. 앤은 어렸을때부터 불란서에서 자유스러운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사교계의 별이되어 핸리 8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1532년 앤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뛰어난 미모에 음악가이며 무용가이기도 했던 왕비는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으나 핸리 8세는 그와의 결혼을 후회하여 앤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1936년 간통죄로 처형하였다. 앤이 도끼로 목이 잘려 처형당한 장소는 오늘날까지 런던탑 안에 표시되어 있다. 당시 죄목은 간통죄였으나 실제로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앤이 처형 되기도전에 핸리 8세는 셋째부인 제인 세이모르와 결혼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가 된 제인은 결혼 일년이 조금지나 햄튼궁에서 사망했다. 네 번째 부인인 크리브의 앤과 연이어 결혼했으나 얼마있다가 헤어졌으며, 다섯째부인 케더린 하워드도 그의 부정을 이유로 처형하고 여섯째이자 마지막인 케더린 파와 결혼했으며 케더린은 왕보다 오래 살았다. 핸리 8세가 당시 건설한 대연회장은 길이가 32m, 높이가 12m나 되는 커다란 방으로 사방 벽은 대형 자수 그림으로 치장되어있고 천장은 정교하면서도 복잡한 아치형의 참나무장식으로 치장되어있으며 바닥은 마루바닥이다. 벽걸의의 내용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얘기를 수놓았는데 실제 금 은사를 이용했기 때문에 5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빛이 바래지 않고 은은한 광택을 자랑한다. 대연회장의 용도는 600명정도 의 대규모 다이닝룸으로 쓰였으며 왕과 왕비의 방으로 연결되는 우아하고 넓은 현관으로도 사용되었다. 대연회실과 접견실 사이에는 각종 사슴뿔로 장식된 방이 있으며 이 사슴뿔 장식방을 지나면 대접견실이 나온다. 원래 이 접견실 옆에는 핸리 8세의 거처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없어졌으며 생전 핸리 8세는 이곳에서 각종 손님을 접견도 하고 또 식사를 하기도 했다. 많은 유럽의 궁전과 같이 이곳에도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이 있다. 이중에서 특히 핸리 8세의 다섯째부인인 케더린 하워드의 유령이 실려있다는 자수 그림이 있는데 내용은 젊은 왕비가 결혼한지 15개월만에 간통죄로 체포되어 왕궁에 유폐되는데 런던탑으로 보내지기전 도망을 시도하다가 지금 미술관 문을 나서다가 근위병에 잡혀 다시 끌리어가는 모습이다. 캐더린은 본성이 정숙하지 못하여 왕비가 되기 이전에도 음악교사와 조카등과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들통나 엄중한 문책을 받은 끝에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의 유령의 외침이 아직도 가끔 미술관에서 들린다한다. 햄튼 코트에 있는 교회는 450여년간 사용된 왕실전용 채플이다. 이 교회는 마치 작은 오페라 하우스처럼 되있어 윗부분에 있는 로얄박스에 왕과 왕비등이 않아 예배를 보고 아래부문 일반석에는 귀족과 왕족들이 않아 예배를 드렸다하는데 교회의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몹시 아름답다. 현존하는 왕의 처소인 킹스 아파트멘트는 핸리 8세때 지어진 아파트를 뜯어내고 17세기말 윌리암 3세때 지어진 것이다. 1986년 3월 이스터데이에 이곳에 불이나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큰 화재를 입었던 것을 6년에 걸쳐 다시 복원하였다. 이곳에는 왕의 접견실과 화려한 침실, 집무실, 서재, 식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식당의 집기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왕비의 처소인 퀸스 아파트멘트도 킹스 아파트멘트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오늘날 남은 이 아파트는 화려한 접견실과, 침실, 다이닝룸을 갖추고 있고 특히 메리왕비의 미술관에는 자수제품의 대작들이 많이 걸려있다. 이 궁전에서 찾아 볼 곳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키친이다. 이 부엌은 처음부터 600여명의 손님을 치를 수 있도록 넓직하게 설계되어 있었으나 핸리 8세때 이것도 부족하여 1200명을 치를 수 있도록 3550평방미터(약 1100평규모) 넓혔다. 이곳에는 정육간, 어물보관소, 훈제실, 제빵소, 찜하는곳, 접시 씻는 곳, 상차리는 곳, 300베럴의 와인을 저장하는 창고등 식사대접에 필요한 모든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햄튼궁전은 내부에 비해 정원이 더욱 아름답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놓았다. 60에이케에 달하는 이 정원중 특이한 것은 남쪽 정원에 있는 1768년에 심은 포도나무다. 이 포도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도 해마다 약 300㎏의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 햄튼궁에서 내려다보는 수려한 정원과 정원에 연이은 템즈강의 풍경은 햄튼 궁전의 품위를 더욱더 높혀주고 있다. 핸리 8세의 38년 제위기간중 그가 애써 꾸며놓은 이 아름다운 궁전에 머무른 것은 811일간밖에 되지못한다. 1540년에는 불란서 대사를 위한 파티를 엿세간이나 열었으며 이때 참석인원이 자그만치 1500여명이나 되었다니 주방장이 꾀나 바빴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왕궁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은 1737년 죠지 2세다. 그는 그의 부인 케로린 왕비가 죽자 이곳에 다시 오지 않았으며 그 후 어느 왕족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1838년에 와서야 빅토리아 여왕은 햄튼궁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며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