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인 런던에서 아일랜드 더블린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의 비행거리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기내식을 거두자마자 이나라 수도인 더블린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창문을 내다보니 황금빛 석양의 금파를 받아 찰랑대는 이리쉬 해변을 끼고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이로 듬성듬성 낮으막한 집들이 보이는게 동화속의 나라에 온 것 같다. 알고보니 이 나라는 법으로 4층정도 높이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도록 되있다. 얕으막한 붉은 벽돌집들이 즐빈히 들어서 있는 더블린 시내의 첫인상은 우선 한가롭고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주말인 금요일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량들 어느것하나 바쁘고 분주해 보이질 않는다. 우리로서는 구별이 잘 가질 않지만 영국과는 종족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글이 다른, 완전히 다른 나라인 아일랜드는 약소국가인 죄로 800년간이나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21년에야 자치권을 얻었다. 말이 영국과 다르다보니 거리의 표지판도 영어와 아이레어 두가지로 씌어있다. 예를들어 경찰차에도 Police가 아닌 이나라말 Garda라고 씌어져 있다. 공항 통관시에도 영국내 다른 도시를 온 듯 여권조사도 세관검사도 없다. 사람 모양도 외모만으로는 쉽게 구분할 수 없을뿐더러 수백년간 영국지배를 받다보니 말도 글도 제나라 것보다 영국어를 보편적으로 쓰고 자기것은 이제 뒷전이 됬다. 그러나 아직도 거리 표지판에 자기말을 먼저 고집하고 초등학교에 서 1주일에 한시간씩 자기말 수업을 한단다. 피지배 민족의 설움이 얼마나 컷던지 영국과 불란서가 축구시합을 하면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직도 불란서 팀을 응원한다. 대리만족을 얻는다고나할까? 우리로서는 언 듯 이해가 가질 않는다. 민족차별 또한 심했는지 지금도 영국사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좀처럼 자기가 아일랜드 사람이라 밝히지 않는다. 그만큼 자기 비하를 하는 경향이 많이 남아있다. 아일랜드는 작은 섬나라이다 보니 일찍부터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영국까지는 지배했지만 아일랜드까지는 오지못했다. 미개하고 토속신앙을 믿던 이 나라에 광명을 가져온 분이 성 페트릭이다. 서기 432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순교한 분이며 그러길래 아일랜드에서 성 페트릭은 최고의 성인으로 추대되있고 성 페트릭 기념일을 최대의 명절로 치고 있다. 원래 페트릭 데이는 3월 17일이지만 올해는 구제역 파동 때문에 우리가 간 5월 19일날 기념행사가 열려 거리에 온통 사람들로 넘친다. 이 행사를 위해 해외에 거주하는 2백만명의 교민들이 참석했다니 대단하다. 까운을 걸치고 페트릭 지팡이를 상징하는 풍선 지팡이를 든 고등학생들의 행열에서부터 각종 가 장행렬의 줄이 끊임이 없다. 모두가 즐겁고 흥겨운 모습이다. 원래 농업국가인 이나라의 국민성도 우리나라와 비슷해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두 한데모여 보내고 결혼식때나 장례식때도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축하해주고 슬픔을 나누는게 이상할정도로 유사하단다. 그래서 이나라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이 술을 마시면 곧장 의기가 투합한다. 페트릭 이 후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던 이나라에 9세기에 바이킹족이 침입을 하였으나 오래 지배는 못하였으며 1169년 앵글로 노르만족이 침입하여 800여년간 지배를 한다. 1532년 핸리8세가 이혼문제로 캐도릭에 대항해 성공회를 선포하면서 케도릭을 믿던 아일랜드가 이에 저항했으나 패배해 기사 통치를 받던 아일랜드는 이때부터 영국에 복속된다. 대부분의 토지는 영국 귀족과 지주들이 차지하고 아일랜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됬다. 1845년부터 4년간 혹심한 기근이 들어 2백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신대륙으로 이민을 갔다. 현재 이나라의 인구가 3백 5십만인 것을 고려하면 인구의 대부분이 굶어 죽거나 이민을 떠난셈이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 정 재계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대통령만해도 케네디, 클린턴, 레이건등 네명이나 배출하였고 이들 교민들의 송금이 이나라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또한 매우 중요하다. 1848년 기근이후 아일랜드에서는 지주 보이 콧트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운동은 자연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1921년 자치가 허용되었고 1937년에 와서야 완전 독립했다. 그러나 영국계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남쪽만의 독립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아일랜드는 영국을 제외한 구라파에서 유일한 영어사용 국가로서 굴뚝없는 산업인 소프트웨어 산업을 유치한 것이 적중하여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천불이나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차림은 수수하기 짝이없다. 그저 아무렇게나 편한데로 걸치고 거리를 활보한다. 온 도시가 전원이고 도시만 벗어나면 모든 국토가 초원이다. 이 나라를 대표할만한 유일한 상표는 기네스 맥주다. 걸쭉한 막걸리 모양의 흑맥주인 기네스는 부을때는 적갈색을 띄나 거품이 빠지면 흑색으로 변하는데 유럽 어딜 가더라도 마실 수 있으며 이보다 연한색깔의 묽은 기네스는 스미스 빅(wick)이라 하고 불머스(bulmers)라는 음료수 비슷한 기네스도 있다. 기네스로 돈을 많이 번 창업자 스티븐스는 도심 한가운데 공원을 조성하여 국가에 헌납하였으며 물론 관리도 그 회사에서 영구히 해준다. 더욱 대견한 것은 더블린 시민들의 모든 상수도 요금을 기네스사에서 대납해 주기 때문에 모든 시민들은 공짜로 수돗물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멋쟁이 기업인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든다. 이튿날 아침에 산책을 나가보니 호텔앞에 조그마한 하천을 갑문식으로 만들어 운하를 만들었는데 그곳에 배들이 여러척 정박해 있었다. 성 페트릭 데이를 기념해 유람을 떠나는 배들인지 갑문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배를 내려보내느라 갑문을 열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일랜드 관광은 크게 북쪽으로 벨파스트시와 이 섬 최북단에 있는 코즈웨이라는 자연석 융기 현상을 보는 코스와 서부 해안지방을 보는 코스가 있는데 우리는 북쪽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차가 더블린을 벗어나자 끝없는 초원이 펼쳐졌다. 푸른 풀밭 사이로 수도 셀 수 없는 소와 양,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그 옆으로 듬성듬성 노란 개나리색의 고스꽃(gorse, 가시나무 금작화)들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으며 하늘에는 뭉게 구름들이 떠 있는게 너무나 목가적이었으며 어디에선가 이나라 민요인 데 니보이가 들리는 듯 했다. 도로변 어디를 둘러봐도 공장이나 휴계소 같은것은 없었으며 민박집 B&B(Bed & Breakfast)간판만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북아일랜드와의 국경이 가까워오지만 다른 도로와 다른게 하나도 없고 다만 환전소만 눈에 띌 따름이며 어디가 국경인지 우리로서는 분간도 못한다. 북아일랜드 국경에 있는 평화도시 던 달크에는 예외적으로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있다. 이곳에는 영국 정부에서 아일랜드와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해 투자를 많이 해 놓았다는데 물론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고용은 자유다. 따라서 아일랜드 사람들한테 인기가 있단다. 주유소 옆에 슈퍼같은 가게에 들려봤더니 사과, 살구, 딸기같은 농산물을 진열해 놓았는데 일조량이 부족해 빈약하기 짝이없다. 이나라에서 감자도 생산된다하나 농사가 시원찮단다. 일년내내 구름이 끼어있거나 비가오니 농사가 될리없고 대신 풀은 잘자라니 자연 목축업이 발달됬다. 정확하게 말해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소프트웨어 산업마져 유치하지 못했더라면 아일랜드는 영원한 목축국가 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분쟁지역으로 신문에서만 봤던 벨파스트가 가까워오니 북아일랜드 독립운동 단체인 신페인당 당수 게리 아람스의 사진이 거리에 널리 걸려있고 아일랜드기가 조기와 함께 즐빈히 걸려있다. 이곳은 신구 교도지역이 엄격히 분리되있는데 아일랜드계인 구교도 지역에 온 셈이다. 벨파스트 이야기는 다음에서 하기로 하고, 벨파스트 시청앞에 차를 세워놓고 멕도날드로 점심을 때운 일행은 해안도로를 따라 코즈웨이로 계속 달렸다. 어딜가나 초원이고 가시나무 금작화고 찰랑이는 바다의 연속이었다. 아일랜드섬의 최북단에 위치한 자이안트 코즈웨이(거대한 주상돌기)는 해암이 오랫동안 침식하고 융기하면서 육면체나 칠면체의 돌들이 마치 수백수천개의 연필을 한데모아 세워 놓은 듯 질서있게 정돈되 있는 모양이 장관이었다. 이 주상돌기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 곳 바다를 계속 북쪽으로 가면 스코트랜드 땅이다.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더블린에 돌아오니 성페트릭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정말 녹초가 되도록 강행군을 한 하루였다. 이튿날도 날씨가 청명하다. 여기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며칠간씩 이렇게 날씨가 맑아 본적이 드물다니 운이 좋은 셈이다. 이날은 더블린에서 두시간 거리의 브리타스베이에 있는 유러피안 크럽에 골프를 나가봤다. 말로만 듣던 정크스 코스에다가 세계 골프장중 24번째에 꼽히는 홀이고, 길이 100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린을 가진 홀도 있다기에 몹시 가슴 셀레여졌다. 정크스 코스란 해변가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꼭 필요한 페어웨이와 그린만 잔디를 심어 놓은 골프장이라 해변 특유의 바람이 심한데다가 러프에 공이 들어가기만 하면 억새풀이나 가시나무 금작화 때문에 빠져나오기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며 풀이 길어 공도 찾기 어렵다. 벙커또한 깊어 턱이 높기 때 문에 빠져나오기가 몹시 어렵고 홀마다 거리또한 만만치가 않아 치기는 어려웠지만 새로운 도전코스에서 맘껏 쳐볼 수 있어 기분좋은 하루였다. 정크스 코스는 바닷모래 위에 조성했기 때문에 빗물이 잘빠져 우기인 겨울코스로 인기가 있다하며 우리가 방문했던 날은 손님이 우리밖에 없다시피하여 해변에 연이어 있는 파5코스를 몇번이고 되돌아가서 쳐보곤하여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사를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곳 장대사님과 함께 가 본 두르드 그랜 골프클럽 같은 곳은 오래된 영주의 장원을 호텔로 개조해 쓰고 관목숲과 농장을 이용해 만든 골프장으로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고 수백년된 관목숲에서는 구구새와 뻐꾸기가 노래하며 종달새마져 우지져 정말 그림같고 꽃밭같은 그런 코스였다. 이 날은 날씨 또한 청명해 새털구름 사이로 태양이 비추워져 먼지하나 없는 시야사이로는 초원속에 양떼들이 노니는 모습은 천국이 여기가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