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용 수
|
思秋期 인생 편히 쉬고싶다. 아무런 動作도 필요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냥 침묵하고 싶다. 사랑을 비우고 싶다. 속이 빈 대나무처럼 無만 생각하고 싶다. 긴장을 풀고 싶다. 주지도 받으려고도 않고 그냥 마음 편하고 싶다. 아무런 執着도 필요 없이 그러다가, 깨어나게 되면 부처를 찾을 테니까. |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애에 한두번쯤 피할 수 없는 고독과 허무를 겪으며 살게 마련인가. 이제는 살 만하다 싶을 때, 또는 가을 어느 날에 그 누구에게도 공감되기 어렵고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에 부닥치는 중년(中年)의 고독과 허무 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직장도 가정도 짜증스럽고, 어디로든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경우를 나는 한두 번 겪은게 아니다. 이순(耳順)에 다다른 나이에 그동안 피땀 흘려 온 생활이 고작 이 정도라니, 내 한창 때의 빛나던 꿈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고. 가난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푸념이나 허탈같은게 있을까 하고. 마음 다잡으며 추스려 보지만 이제 새로운 무엇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그렇다고 현재를 포기하기엔 살아온 세월이 아깝다. 그래서 나 혼자서 탄식하고 방황하다가 문득 돌이켜지는 인생, 그 고독과 허무를 내 어찌 배겨낼 것이랴. 중년의 억울증일까, 사추기(思秋期)의 우울증일까? 문학과 직장, 문학과 가정, 나는 왜 그렇듯 복잡하게 살아왔을까? 능력도 체력도 건강도 달리는데 남들에 뒤지고 싶지 않아서 전공(專供)에 짓눌려 살아졌다니 한심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기분은 싹 접어 두고 어디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시 한줄을 붙잡고 하얗게 밤새우는 희열에 얼마나 심취했더냐. 그 기쁨, 그 기막힌 희열을 누가 알아주더냐. 하지만 이제 와서 문학을 포기하자니 그나마 나를 웃게 한 것도 울게 한 것도 사실은 문학이 아니더냐. 비록 내가 그동안 단 한편의 시를 성에 차게 쓰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자주, 얼마나 고통스럽게 시를 사랑했더냐. 주제꼴에 감히 시를 쓴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하고 또 얼마나 황홀해 했더냐.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 그 어떤 사회적 호칭을 얻기 전에 가장 먼저 시인이 되었지 않았더냐. 그야말로 가장(家長)이기 전에, 직장인이기 전에, 아니 나 자신 가장 순수했던 젊디젊은 대학생 때 열성과 애정으로 시인이 되기를 갈망했던 바다. 그리고 한 편의 절창(絶唱)을 쓰고 죽으리라고 다짐하고 소망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 다짐도 소망도 저버리고 이제 와서 문학을 포기해? 그러고도 시인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할 것이냐. 차라리 다른 것은 버릴지언정 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즈막에 내가 늘 괴롭고 부끄럽고 미안스러운 것은 왤까? 그래, 더 이상은 집착하지 말자. 그 이상의 나 자신과 싸우고 갈등하는 불행을 싹 끄집어 내어 정리하자. 아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래서 문학과 직업, 문학과 가정에 갈증이 아닌 서로간에 도움되는 신선한 휴식의 방편으로 삼자. 글을 쓰는 일이 가정에서 또는 직장에서 피곤을 풀어내는 휴식이라 여기자. 아무렴 내가 써 놓고 못마땅해서 화가 나더라도 문학을 포기하지 않고 사니 얼마나 좋은가 하고 기뻐하자. 굳이 시의 장르에만 묶이지 말고, 또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쓰되 쓰는 즐거움 이상의 아무련 대가를 기대하지도 말자. 그렇게 긴장을 풀고 조금은 편해지자. 시류(時流)에 다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 않으냐. 사람에 따라서 삶의 뜻과 양식이 다를 테니 흐름을 따를 수도 또 거스를 수도 있다. 다만 삶에 필요한 지혜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움트는 것이려니 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 값지려면 모름지기 풍요롭고 폭 넓은 바탕에서 비롯되어져야 하는데, 나는 허술한 기초 위에 문학과 가정의 울타리를 성급히 세웠던 듯 싶다. 젊디젊던 시절 시인이 되는 길에 집착하다가 많이 보고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감탄하고 만들어 내는 긴긴 과정을 생략했으니까. 그동안 살아 보니 인생의 길에 어디 생략이란 게 있던가? 인생에 지름길이란 없다. 생략될 수 있는 과정도 부분 어느 하나도 없지 않더냐. 인생이랑 벽돌 한 장 위에 또 한 장씩 차근차근 올려 놓아야 단단한 10층 집이 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 단층 집으로만 기초를 다지고서 그 위에 어찌 10층을 쌓아 올릴 것이랴. 집을 짓는다는 생각만 했지, 10층 집 주인과 단층 집 주인의 기초가 엄연히 다름을 내 젊었을 때는 왜 깨닫지 못했더냐. 문학을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그냥 생활인으로서도 풍부하고 폭 넓은 지혜와 멋을 내가 왜 배우지 못했을까, 새삼 돌이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