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정부에서 근무할 때 올해의 공무원으로 뽑혀 정부 주선으로 내외가 함께 유럽을 돌아볼 영광스런 기회가 있었다. 그때 안내한 여행사의 직원이 다음 기회에 꼭 프라하를 들려보라고 권유한 일이 있어 기회를 보던차에 금년 오월 더블린을 들린길에 프라하를 찾아 볼 수 있어서 오랜 꿈이 실현된 셈이다. 공항에 내리니 날씨는 쾌청하고 햇살이 따가와 오월이라지만 우리나라 가을날씨처럼 하늘이 해맑았다. 프라하는 천년 도읍지답게 고색 창연한 가운데 짜임새가 있었으며 사회주의 국가체제로 오래 지내와서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은 때가 덜 묻은 듯한 인상이었으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체코는 일찍이 기계공업이 발달하여 6.25전쟁때 북한군이 사용한 무기의 상당수가 체코제였을 정도니 사회주의 국가치고 아주 잘사는 나라이다. 지금도 1인당 국민소득이 8천불이나 되고 물가가 싸기 때문에 실제 구매력으로 따지면 1만불 수준이라니 우리나라보다 훨씬 살기좋은 나라다. 이 나라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70년대 월남전쟁 기간중 많은 물자를 월맹에 지원해 주고 원리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월맹으로부터 돈 상환대신 노동력 지원을 받았는데 이때 온 사람들이 그대로 주저앉아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연 이나라 사람들은 동양사람들을 베트남 높이 수준으로 평가한다하니 참고해 두는게 좋겠다. |
1968년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자유개혁안을 채택, 이른바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우리에게 깊이 인식된 프라하는 유럽의 십자로 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이래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프라하는 10세기 초 까지만 하더라도 프레미슬리드 가문이 다스리던 도시국가였다. 이 가문을 세운 전설적인 사람은 리부세 공주인데 슬라브족의 족장이었던 그녀는 여성통치에 불만을 느낀 부족민들을 달래기 위해 평범한 농부와 결혼하여 그를 통치자로 내세웠다. 그 뒤 이 가문의 형제간에 싸움이 빈번했는데 935년 벤체스라스 왕자가 그의 형 블레슬라프 왕자에 의해 교회안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벤체스라스는 후일 성인으로 |
▶ 왕궁 |
추대되어 보헤미아 어딜가도 그에 대한 역사를 모르고는 얘기가 안될 정도로 이나라 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뒤 신성로마제국 카를 4세 황제때 프라하는 런던이나 파리보다 훌륭한 도시로 성장했다. 12세기 초반부터 지금의 프라하 성은 모양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궁전과 종교 건축물은 석조건물로 대체되었고 요새도 모습을 갖추었다. 이 후 중세말 카를 4세때는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대학을 건립하고 프라하성을 다시짓고 신시가지도 건설하였으며, 체코 왕국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유럽의 강국대열로 끌어 올려놓았다.
유럽 최초의 대학이기도 했던 체코대학의 초대 총장은 얀후스였다. |
얀후스는 보헤미아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종교사상가가 된 사람이다. 얀후스는 카도릭 교회의 사치스러운 관례나 형식적인 것을 배격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운동은 당시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자연 추종자들이 많이 생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로마교황은 그를 이단으로 파문했으며 1415년 화형에 처했다. 그 뒤 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후스를 추모하여 교황의 십자군과 전쟁을 하여 유럽 전체를 공포분위기에 휩싸이게 했는데 이들은 농기구등을 무기로 개조한 보잘 것 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나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온건파에게 패하여 반란은 종료되었다. |
▶ 성포네무크의 동판을 만지며 기도하는 관광객 |
그러나 후스는 후일 순교자로 추대되어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다. 카를 4세이후 체코왕국의 국력은 침체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사실상 합스부르크가의 통치를 받게 된다.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드 1세에 의해 지배를 받았으며 1619년 일부 귀족들이 붕기해 페르디난드 2세를 폐위시켰다가 이듬해 빌라 호라(백산)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에 패한 뒤부터 4백여년간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오스트리아의 사실상 일개 부속주로 전락된다. 함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동안 프라하는 바로크 시대의 금자탑을 이룬다. 바로크식의 교회들이 세워지고 특히 루돌프 2세는 정치보다 예술을 좋아해 궁정은 이탈리아 예술가와 건축가 예술가와 천문학자, 연금술사와 같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함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동안 프라하는 바로크 시대의 금자탑을 이룬다. 바로크식의 교회들이 세워지고 특히 루돌프 2세는 정치보다 예술을 좋아해 궁정은 이탈리아 예술가와 건축가 예술가와 천문학자, 연금술사와 같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프라하는 1차 대전이 끝나고 1918년이 되어서야 체코의 정식 수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1939년에는 독일군이 프라하에 진입하여 나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40년동안 공산치하에 있다가 1993년 다시한번 체코 공화국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
▶ 왕궁근위병 교대식 |
프라하시내 중심지는 대개 볼타바강을 중심으로 왼편은 프라하성과 흐라드차니, 소지구가 있고 오른쪽으로 신시가, 구시가, 유대인시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시가지가 넓지않고 아기자기 하기 때문에 도보로 관광을 하기에 좋다. 프라하 관광의 제일 기착지는 프라하성이다. 볼타강 상류의 언덕위에 지어진 프라하성은 9세기에 보리보위 왕자에 의해 최초로 건립되었으며 그 뒤 많은 중개축이 있었으며 16세기 루돌프 2세때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성안에는 한채의 궁전과 세채의 교회, 그리고 한채의 수도원이 있다. 1320년에 성벽 주위에 흐라드챠니라는 마을이 생겼다. 프라하성의 백미는 성 비투스 성당이다. 1344년 카를 4세의 명에 따라 지어진 이 성당은 오늘날에 와서야 완성되었을 만큼 오랜기간동안 건설되었다. 성당안을 들어서면 이 성당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신고딕양식의 석조아치들이 높은 지붕을 장식하고 있어 그 조화로움에 넉을 잃게 만든다. 성당안에는 소예배당과 왕의 기도실, 왕의 무덤, 지하납골당까지 함께 있으며 특히 대성당 강대상 바로 앞에 페르디나트1세 내외와 그의 아들의 대리석 묘가 있어서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여행객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또 자기 형에의해 암살된 성벤체슬라스 왕자의 예배당에는 그의 무덤이 제단과 함께 있으며 예배당 북문에 달린 청동으로 된 문고리는 벤체스라스가 형 블레슬라프에 의해 살해될 당시 쓰러지면서 매달렸던 바로 그 문고리라고 알려져 있다. 프라하 왕궁은 처음부터 보헤미아 왕자들의 거처로 쓰였다. 궁전안에는 의사당과 집무실, 외빈접견실, 토지문서보관소, 대사관사무국 등이 있으며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1618년「창밖으로 사람들을 던진 사건」의 창은 바로 보헤미아 대사관 사무국의 창이었다. 당시 구교를 신봉하면서 신교를 인정하지 않던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기 위해 1618년 5월 23일 투튼백작이 100여명의 신교도 귀족들을 데리고 행진을 벌였다. 왕궁에 들어간 이들은 대사관 사무국에서 구교도들과의 한바탕 싸움 끝에 신교도 시위대가 구교도 지도자 두명을 창문밖으로 내던졌다. 던져진 두 사람은 15미터 아래 궁정뜰로 떨어졌으나 다행히 엉덩방아만 찧고 일어났다. 이를두고 카도릭 측에서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왕궁 부속실중 특이한 곳은 블라디슬라프 홀인데 대규모 연회장인 이곳에서 말을타고 마상 창 시합도 하였다하며 말을타고 출입할 수 있는 출입구가 별도로 있다. 프라하 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회화관이다. 루돌프 2세때부터 모아진 미술품을 전시한 이곳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루방스등 대가들의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실내 관광을 마치고 정원에 내려서면 볼타강을 중심으로 시기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오밀조밀한 골목길과 그길 옆으로 지어진 많은 집들이 모두 붉은 지붕으로 지어져 있으며 지금의 시가지 모습은 성 비투스 성당안에서 본 16세기 프라하 전경을 새긴 목판화와 크게 다르지 않는게 참으로 신기했다. 성곽을 나서보면 자그마한 예쁜 집들이 성곽을 끼고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골목길이 나온다. 이 짧고 좁은 골목길이 황금길이다. 이 집들은 1500년대 후반에 경비대원들의 숙소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금세공인들이 이주해 와 살았다. 현재 관광객들을 상대로 유리공예품과 기념품을 팔고있는 이 집중 22번지에는 이나라가 자랑하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1916년부터 1917년까지 누이와 함께 살았던 집이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성도 이곳에서 쓰여졌다한다. 성아래 동네인 소지구는 18세기말 이후로 새로 지어진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다. 특히 볼타강을 끼고 소지구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카를교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아보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다리 양쪽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인들의 동상들을 가득 만들어 세운 보행자 전용 돌다리이지만 한때는 마차 네 대가 나란히 지나다니던 볼타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 길이 520미터의 이 다리는 사암블록으로 1357년부터 세워졌으며 원래는 나무로 된 예수수난 십자가가 장식의 전부였으나 2백여년 뒤 많은 조각품들을 만들어 진열하기 시작했다. 조각품중 인기있는 곳은 성 존 네포무크의 조각상에 부쳐진 네포무크의 순교장면 부조다. 1792년 성인으로 추대된 네포무크는 얀후스를 경계하기 위하여 예수회 주도로 추대되었다. 당시 대수도원장 선거에서 왕의 뜻을 거슬렸던 네포무크는 1393년 체포되어 묶여진 채로 카를교 너머로 던져져 죽었는데 이 순교장면을 새긴 동판부조를 만지면 행운을 얻는다하여 수세기동안 많은 사람들이 만져 동판이 닳아 반질반질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를다리 건너편에 있는 구시가지 광장은 프라하성을 제외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11세기때부터 시장이 이곳에서 열렸다. 구시가지중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구시청사에 있는 천문시계이다. 프라하의 명물중의 하나인 이 천문시계는 1410년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하누슈에 의해 만들어졌다. |
이 천문시계는 천동설에 입각하여 위아래 두 개의 원위에 시계장치를 하였는데 위원은 해와 달의 움직임을 묘사하여 1년에 한바퀴 돌며 년,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에 있는 원은 12개의 계절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헤미아 지방의 농경생활의 절기를 나타낸다. 이 기할하고도 아름다운 시계에 대한 소문이 유럽 각국으로 퍼지면서 다른나라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시계를 혼자서만 가지고 싶었던 프라하 시 당국은 하누슈 교수가 다시는 시계를 만들 수 없게 장님으로 만들었다. 장님이된 하누슈 교수는 자기가 만든 시계를 한번만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시계탑에 올라가 이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는 그대로 멈추어버려 4백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한다. 그 후 1860년에 수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아직도 매시 정각에 시계바늘 윗부분에 있는 창문 2개가 열리면서 아름다운 종소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12사도 모양을 한 인형이 차례로 얼굴을 내밀고는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닭이 울면서 시계종이 울리는데 매시간 마다 이 광경을 지켜보기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구시가지 주위에 12세기부터 유대인이 거주해온 유대지구가 있다. 이곳에는 몇 개의 유대인 교회(시나고그)와 유대인 묘지, 민가등이 남아있다. 히틀러 점령기에는 6만명이나 되던 이들 인구가 2500여명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한다. 구유대인 묘지지역에는 크고작은 1만 2천여개의 묘비석이 부서진채로 쌓여있거나 서로 지탱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묘비석은 1439년 사망한 시인 아비그로르 카라의 묘비석이며 가장 새로운 것은 1787년에 세운 묘비석이라 한다. 1348년 카를 4세때 조성된 신시가지는 당시 대장장이나 목수, 상인, 양조업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구획이 잘되고 세심하게 다듬어진 지역이다. 아직도 이곳은 베체슬라스 광장을 중심으로 호텔과 각종 상점들이 즐비한 상업의 중심지이다. 1969년 얀팔라흐라는 학생이 자유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했고, 1985년 고르바쵸프의 개혁 개방정책이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져 1989년 경찰의 잔혹행위에 항거하는 집회가 열렸으며 마침내 이러한 항거는 벨벳혁명으로 이어져 1990년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프라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가 많다. 보헤미아에서 유명한 필스 너(pilsner)는 생맥주가 유명하며 호프열매의 향기가 강하게 남아있는 특징이 있다. 필스너라는 말은 플젠(plzen)이라는 도시이름에서 유래됐는데 지금도 플젠스케 맥주와 필스너 우르켈이라는 맥주를 생산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부드러운 맥주로는 버드와이져 부드바르 (Budweiser Budvar)가 유명한데 미국의 똑같은 상표의 맥주회사에 상호도용 소송을 해서 근래에 체코 버드와이져가 이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나라 맥주의 역사가 얼마나 길고 질이 좋은지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프라하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베체로브카라는 술이 있는데 각종 약초로 담거 약간 달면서도 한약 냄새가 나는 이 술은 식사 후 에피타이져로 주로 마시는데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술이니 프라하를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한병 사올 것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