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석 인
이백여년간 흥청거리던 쿠트나 호라도 16세기에 들어 은자원이 고갈되자 점차 쇠락해지기 시작했으며 1727년부터는 은화 주조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1층에 화폐주조에 쓰였던 용광로가 남아있는 이타리안 조폐창은 그후 시청청사로 쓰여지고 있으며 광구를 이용해 요새로 쓰였던 흐라데크라는 고대 건물에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이곳을 찾으면 당시의 광산구조와 화폐주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을 중심의 요새같은 절벽위에 우뚝선 바바라 성당은 광부들의 수호 성인인 바바라 성인을 모시는 교회다. 세 개의 그물 중앙을 잡아 당긴듯한 모양의 지붕축에 뾰족탑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사방을 아름다운 스테인드 그라스로 장식한 고딕식 양식의 이 건물은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신부의 강대상이 본당의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어 강론하는 신부가 사방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어있으며 벽의 장식으로 그려진 벽화는 주로 은광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교회밖을 나서면 주물로된 커다란 수도꼭지가 달린 옛날 물 저장소가 그대로 보존되 있다. 아마 이 수도꼭지로 흐르는 시원한 물이 광부들의 목을 적셔주고 땀을 닦게 해주었으리라.
이곳은 아직도 공동묘지로서 역할을 하는지 교회밖 묘지에 어떤 중년여인이 꽃을 갖다놓고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더니 묘비석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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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차로 두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쿠트나 호라(Kutna Hora)는 로마시대부터 은광산으로 유명하다. 쿠트나 호라로 가는 길 양옆으로 오월의 태양아래 흐드러지게 핀 노란 유채꽃이 고향동산에 찾아온양 더없이 정겨웠다. 이곳에는 유명한 성 바바라 교회와 KBS에 방영되어 우리나라에 알려진 해골교회가 있어 찾아봤다. 지금은 은광이 폐광되어 광산 자체로는 강원도 철암이나 황지를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14세기 까지만해도 채광권을 왕실이 가지고 매년 5∼6톤의 은이 채굴되어 노다지 촌으로 흥청거렸으며 은을 캐러 사람들이 몰려들어 보헤미아에서 두 번째의 큰 도시를 이루었고, 왕실을 유럽에서 가장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당시 전 유럽에서 통용되던 은화 프라하 그로첸이 바로 이 곳 이타리아 조폐창에서 제조된 것이었는데 이타리안이라고 이름을 부친 것은 화폐를 주조하는 기능공들이 모두 이태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이 이곳에 몰리자 왕도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14세기 후반에는 이층짜리 궁전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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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성당은 수만명의 해골을 보관한 납골성당이다. 그리 크지않은 교회는 정원이 온통 돌비석들로 가득하다. 교회안을 들어서니 사방이 사람들의 해골이고 뼈들을 피라미드처럼 체계적으로 쌓아 놓았으며 천장에 있는 대형 샹들리에도 모두 해골과 인골을 연결하여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온 교회가 킬링필드처럼 뼈를 가득 채워 놓았으니 냄새도 퀴퀴하고 기분이 좋지않았다. 이곳은 12∼3세기경 어떤 수도사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한줌 흙을 가져와 여기에 뿌린후부터 유명한 공동묘지가 되었다한다. 차차 이 묘지에 대한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자 이웃나라인 폴란드와 벨기에 등지에서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으며 후일 얀후스 전쟁때 죽은 사람들도 모두 이곳에 묻혔고 흑사병이 퍼져 쿠트나 호라에서만도 6천여명이 죽자 이들 모두의 시체를 이곳에 묻었다한다. 그 뒤 18세기에 와서 어떤 귀족가문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교회를 인수하여 4만여구의 인골을 정리하여 피라미드 형태로 쌓고 해골로 가문 문장도 만들었으며 이를 이용해 6개의 샹들리에도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