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오년(壬午年)의 새아침, 다시 한 해를 새로이 맞이했다. 묵은해에서 한 밤을 자고 나니 바로 그 아침이 새해이듯 겨울이 가면서 봄이 이어지고, 앙상하던 가지에도 으레 새잎이 돋아난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오늘따라 흰 눈이 내린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 볼에 닿는 찬바람도 친구인 듯 싶어서. 아니,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단정한 차림의 여인이 불숙 나타날 듯 싶어서. 흔히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멀리 있는 얼굴을, 또는 뭔가 자신을 긴장시키는 낯선 얼굴을 더 매력적이라고 곧 잘 생각한다. 날마다 곁에서 대하는 편안함보다 비일상적(非日常的)인 꿈속의 얼굴이 가끔은 그리워지는 게 우리들 마음인 듯. 그래서 눈길을 거닐고픈 마음이 이는 듯. 연인을 찾아가듯 집을 나서고 싶다. 외로울 때 외롭다 하고, 보고 싶을 때 보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 어디쯤에 있을 까 하고. 그리움과 사랑의 가슴이면 들리는 것 보이는 것들 모두가 아름답고 신비로워지니 그런 가슴으로 어디로든 훌쩍 다녀오고 싶다. 발길 닿는 곳이 깊은 골짜기면 어떻고 개똥밭이어도 상관없다. 거기에도 흰 눈이 내렸을 테고, 보석보다 값진 신비와 비밀이 불쑥 얼굴 내밀며 깍꿍하고 인사할 테니까. 개똥밭이든 산골짜기든 천천히 걸으면서, 걷다가 문득문득 뒤돌아보며 발자국에 찍힌 나의 옛 것들을 더듬기도 하면서. 사랑이 새삼 그립다. 사랑이란 말처럼 세상세서 가장 때묻은 게 또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늘 신선하고 황홀하고 감동적인 게 또한 사랑이지 않은가. 겨울 속에서 보리가 움트듯 그런 사랑을 찾아 눈길을 걷고 싶다. 외로울 때 외롭다 하다가, 그리울 때 그립다 하다가 정작 사랑할 땐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사랑한다는 그 말 외에 무슨말이 더 필요할까. 그 마음이 누구나의 소망이고 진실이 아닐까. 물론 사랑이 헤프면 천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목숨을 바칠 만큼의 절실한 사람을 위해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가슴 속 깊이 품고사는 사랑이라면 그 어떤 보석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진실과 거짓을 혼동하며 살고 또 속이고 속으며 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란 그릇 속에 가장 진솔한 마음을 담게도 되고 가장 때묻은 마음이 담겨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가을의 돌담길에서 낙엽 밟는 것이 좋다가도 겨울이 오면 흰 눈길이 매력적인 게 역시 우리들 마음이다. 모처럼 외출하고파 창을 여니 양지쪽에 내리는 햇살이 눈에 시다. 서릿바람도 좀은 다숩게 느껴지고, 마른 가지에도 물이 오른 듯 싶다. 마냥 한겨울일 듯 싶더니 새아침 기운이 확연하다. 지난날은 너무 숨가쁘게 살아온 듯 싶다. 걸어왔다기보다 앞만 보며 뛰어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진짜로 볼 것 가질 것 다 놓치고 어뚱한 것만 움켜잡지 않았을까. 살다 보면 세상엔 가장 연약한 것이 가장 강하지 않던가. 영하의 기온도 잔설(殘雪)도 아직이지만, 그 굳은 땅 껍질에서 싹이 트고, 마른 나뭇가지에도 새잎이 어김없이 돋아나니 말이다. 내 사랑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