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容秀
아침 해가 오늘따라 부신 듯 희끄무레하다 내 어릴 적 사랑이 꼭 이랬다 그래도 그땐 빛깔이 있었는데 다정함의 파랑 강렬함의 빨강 행복함의 노랑 프리즘의 그런 빛깔이었는데 그래서, 뒷동산엔 진달래가 피고 때아닌 강강술래 대열에 끼어 다스운 피 솟구치던 걸 누가 눈치챘을까마는 아침 해가 웃고 있었지 안개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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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부신 듯 희끄무레하다. 어제 만난 친구가 문득 생각난다. 일주일에 한번쯤 가는 약수터 후미진 길 섶에 아직 잔설(殘雪)이 있을 법한데 벌써 개나리가 새순을 뾰죽이 내밀고 있었다. 어느새 봄이다. 봄의 푸른 빛깔이 코앞에 바싹 다가섰다. 산자락이 푸르름에 젖는데 난 어이할 것인가. 인간의 삶이란게 초목들의 일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어늘. 아침저녁으로 봄의 향기에 흠친 젖는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을 보며 새삼 젊은 나이로 되돌아가는 것같아 괜히 설레진다. 꽃처럼 향기로워지고 눈시울이 뜨겁도록 항홀해져서 어지럼증이 인다. 이 푸른 현기증이여! 산잙마다 아지랑이가 헷갈리게 피어오른다. 무심코 양지(陽地)에 나앉아 세월세 묻혀진 사건 하나쯤 찾아내듯 가슴속 먼지를 털어낸다. 조용히 눈감은 속눈썹 끝에 아른대는 꽃가루 같은 아지랑이, 이 봄에 몸살이라도 앓고싶다. 나이와 상관없이 황홀해지는 봄볕에 바람이라도 나고 싶다. 며칠 전 모처럼의 휴일 나들이로 산엘 올랐다. 서둘러 꽃망울 터뜨린 매화에 앗겼던 마음을 개나리 시샘으로 달래 보지만 가슴이 더 콩닥거린다. 제비꽃이 눈에 띄자 나도 그처럼 앙증스럽고 싶고, 오동나무를 보자 봄바람에 가락을 타고 싶어졌다. 저들은 이 봄에 빨갛고 노랗고 푸르게 제 모습 제 빛깔에 열심인데, 별 수 없는 나는 꽃들만도 못해 산등성이에서 현기증을 앓는 시인(詩人)일 수 밖에 없더란 말인가. 제발 이 봄엔 나도 한번쯤 꽃나무이고 싶다. 한겨울의 긴긴 추위와 고독과 역경을 견뎌내고도 제 빛깔을 피워내는 꽃나무와 함께이고 싶다. 마른 가지에서 새순을 틔우고, 가지 끝끝마다 향기 짙은 그리움을 피워내는 꽃나무만도 내 어이 못할까. 참말이다. 그동안 하찮게 보아 오던 꽃나무들이 봄맞이를 제 것으로 멋지게 차지하는데 난들 왜 못하는가? 모양새로 흉내내지 못할 양이면 원고지 칸이라도 제대로 메워내는 시인 몫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저들은 멍청한 바윗덩이 틈에서도 온 힘을 다해 제 몫의 봄을 눈부시게 엮어가는데…. 그렇다! 기운내자, 힘내자, 다시 시작하자, 내게도 능력이 있지 않나. 이 봄이 꽃나무들 것만이 아니라 내 창작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새촉을 틔어낼 수 있지 않느냐. 맨발로 흙을 딛고 서면 대지의 봄 기운이 발바닥에서부터 머리 끝으로 끈끈히 뻗쳐 오를 테니까. 우선 소식 뜸했던 친구에게 겨울잠에 빠진 우정을 일깨우는 엽서 한 장부터 띄우자. 설렘이 가시지 않은 채 산을 내려왔다. 무심코 내려다본 댓돌 아래서도 아지랑이 되어 오른다. 사람들이 다 나와 같다면 누가 나랑 살아 줄까? 죽은 듯 앙상하던 가지 끝에 생명이 숨쉬듯 오늘 아침엔 새삼 부처가 떠올려진다. 어찌어찌 짬내어 조용히 어느 암자(庵子)라도 찾아 나설까? 봄 햇살이 하 향기롭고 아름다워서 누구에게라도 이끌려 길을 나서고 싶다. 그렇게 마냥 걷다가 꽃잎 떠 있는 샘물을 만나 목추기고선 가슴 갈피갈피마다 꽃바람 쟁이는 시 한 수 읊고 싶다. 오, 봄의 향기여, 나의 생활이여, 푸른 현기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