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수
아침 햇살이 참 부시구나 숲길을 돌아 나오니 솔바람이 반기고 사랑에 물든 영혼의 빛이 온 들녘에 흐르고 있더라니 마침내 내가 네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깊은 사랑이 네 젖은 눈빛에서부터 다시 시작됨이라 너야말로 살아 숨쉬는 꿈 너야말로 내 유일한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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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세 길조(吉兆)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것 가운데 파랑새가 있다. 털빛이 푸른 빛깔의 청조(靑鳥)라 하여, 흔히 나들이에서 만나면 좋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행복의 파랑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며칠 전 3월초 맥 회원들과 모처럼의 나들이 기회가 있어 그 행복의 새를 만나면 좋겠구나 기대도 해보았다. 아무렴 철이 아닌지라 지리산으로 남해로 곡성으로 봄맞이길에 나선 2박3일 동안의 기대는 역시 기대로 그치고 말았지만. 하긴 내게서 파랑새가 문득 떠올려졌을까, 그것부터가 어설프다. 아무래도 행복이란게 나와는 먼 거리에 있었음이다. 그동안 풍요로운 물질문화를 등에 업고 살면서 내 가슴속이 그 만큼 메말랐던 게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삶이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질문화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부자는 쉬이 넘볼 수 있어도, 자연의 엄연한 질서 앞에서 가난하게 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그게 행복이었다. 지난날 바닷가 모래밭에서 조약돌 줍던 풋풋한 사랑도 기억되지만 그게 얼마나 시답던가. 늘상 기다림만큼이나 가난했고, 풀꽃의 외로움만큼이나 은은한 그늘에서 내 시(時)가 살와왔으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지난날들이 왜 쓰디쓰게 돌이켜지는 걸까? 어는 한순간도 저 보봐르의 생애쯤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왜 그럴까, 행복에 한껏 자신(自信)이 없다. 그동안의 내 삶에는 행복이 과연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게 어떤 모습이던가?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물질적 풍요만이 행복은 아니었다. 행복이란 일이나 사랑의 성취에서 능력을 시험하며 그에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지 않을까. 가시투성이 나무에 핌 장미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하는 감정이 곧 행복이 아니던가. 물론이다. 행복은 누가 가져다 주어 겉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행복한가 하고 따지지 않는 것 또한 행복이다. 내 마음이 파랑색이면 그 마음인즉 행복의 파랑새인 게다. 메테를링크가 그의 동화극 파랑새에서 보여준 행복이 바로 그런 거였다. 그 극중(劇中)에서 치르치르와 미치르남매는 진정한 행복이란 건강과 정의와 사랑(母性的)이라고 외치고 있다. 행복은 결코 물질적 풍요로움에 있지 않다고. 아무렴 동화작가 메테를링크야말로 요즘같이 물질문화의 풍요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행복이 무엇인가를 옳게 일깨워 준다. 건강인즉 행복의 조건에 가장 우선이지만 그 또한 나 혼자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이어야 하는 정의로움이요, 또 그것을 모성적 사랑으로 감싸줌으로써 진정한 행복에 다다른 다는 논리다. 그러니 요즘에 행복에 부쩍 자신(自信)이 없어짐은 내게 그 세 가지가 그동안 결핌돼 있었던 결과다. 그래서 봄 햇살따라 나서는 일행에 기꺼이 동참해졌던 게 아닐까. 그렇게라도 내 마음 속의 칠흑 같은 어둠을 씻어내고 싶었던 게다. 오늘따라 아침 햇살이 제법 부시다. 드문드문 잔설(殘雪)이 녹아 내리는 물소리에 마음 적시고 돌아온 게 그나마 좀은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