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용 수
한라산, 또 가고픈 산 소나기 쏟아진 뒤 탐라계곡은 순수한 여름일세. 어느 예과시구처럼 장엄한 녹음, 백록담에 괸 물도 아흔아홉 굽이 돌아 고요하게 투명하게 단숨에 지나쳐 왔거니 하늘과 땅 사이는 모든 것이 친근하고 꼭대기의 입맞춤도 조금도 서툴지 않고 머리 속 또한 궁금한 것 하나 없네그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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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그리움처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하지만 멀리 떠나 살아보지 않고선 고향의 하늘과 산, 그리고 그 아래에 흐르는 물맛의 그리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산천을 지키며 사는 것도 아름답지만, 멀리 떠나 있으면서 제 고향을 목숨처럼 아끼고 그리워하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이다. 해마다 이맘때쯤 나는 으레 고향의 한라산이 보고 싶어진다. 한여름의 그 하늘이 보고 싶고, 백록담(白鹿潭)의 물맛이 그리워 못 견딘다. 오늘따라 불현 듯 바닷바람에 흠뻑 젖고픈 향수에 안절부절 못한다. 땀에 절은 장삼에 밀짚모자 눌러쓴 김삿갓이 되어 쉬엄쉬엄 한라산을 오르고 싶은 것이다.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제멋을 지니지만 아무렴 한라산에 비기랴. 해줄산(海中山)인 한라산은 높기로도 1천952미터의 한반도 제2봉이다. 한 대지방의 고산(高山) 식물이 자라거니와 산허리에는 온대의 야산(野山) 식물이, 산밑에는 해변에 이르기까지 아열대의 열대성(熱帶性) 식물이 널려 있다. 그리고 그 종류 또한 무려 2천5백여 종으로, 백두산 5백여종, 금강산 8백여종, 일본 후지산 1천여종을 훨씬 능가한 동양 제일의 자연식물원이다. 또한 한라산은 자연동물원이기도 하다. 조류(鳥類)가 130여종이요. 곤충류(昆蟲類) 540여종으로 그것들이 철따라 곳따라 제 목소리를 자랑할라치면 온 산천을 신비와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특히 밀림층인 용진굴에 이르러서는 한여름에도 순간순간 오싹하는 냉기와 함께 싱그러운 풀냄새가 가슴을 파고들어 등반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힘겹지 않고,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지 않은 경쾌감으로 정상을 향한 전진을 절로 재촉케 한다. 그뿐이랴. 한라산 정상은 9백여년 전 두세 차례 폭발로 생겨난 30여 정보의 대분화구, 그 백록담의 물맛이 그만이란 건 마셔보지 않고선 설명이 부족하다. 무시로 몰아치는 비바람과 짙은 안개, 구름이 뒤덮이기 때문에 그 백록담에서 맑디맑은 물을 떠마시기란 한라산에 오르고도 그날의 운에 맡겨야 하기에 더욱 그런지 모른다. 몇해 전 산을 여간 좋아하지 않는 친구가 한라산 자락에 보름을 머무르고도 백록담의 물맛을 못 보기도 했으니 그만큼 베일에 싸인 영산(靈山)이다. 문득 송강(松江)의 시 한도막이 떠오른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섰거라 네 가는데 어드메쇼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보지 않고 가노메라. 이 여름에 나그네 걸음으로 길을 나서고 싶다. 멋진 자유인, 멋진 나그네 되어 밀짚모자 눌러쓰고 막대 짚으며 한라산을 오르고 싶다. 그렇듯 한라산을 올라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는 것을. 요즘 나 자신 본의 아니게 고향을 등지고 보니 더 더욱 고향이 그립다. 태어나 자란 땅을 지키고 가꾸지 못한 데에 무슨 염치로 고향을 들먹이랴 싶지만, 그렇기에 그리움이 더욱 애틋하여 한여름이면 으레 한라산엘 가고 싶어진다. 고향의 산하(山河)를 노래하고 싶어진다. 한라산 자락에 누워 계신 어머님을 간밤 꿈속에서 만났다. 어머님 살아생전 뒤란 볕바른 한켠에 장독대의 된장 냄새, 그게 고향의 상징이지. 그 장독재에서 올려다보는 한라산, 그 곳으로 달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