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 容 秀 각시야, 네가 갈아입은 옷은 언제 보아도 마음에 꼭 든다.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붉고 노랗고 갈빛이다가, 간혹 푸른 빛깔도 더러는 남아서 한참은 반짝이고 한참은 멍청하게 팔랑개비로 속을 뒤집어 보여 주며 나를 품안으로 유혹한다. 그것 참 저 하늘의 흰구름도 오히려 산빛 바위빛보다는 네 옷무늬에 잘 반영되어 몇 날 며칠 빛깔의 향연을 베푸느니 단풍아, 이승의 가을 한때를 나는 어떤 모습 어떤 빛깔로나 네 가슴에서 쉬어 갈 수 있으랴. 장마에 말복을 무사히 넘겼더니 가을의 초대를 받는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가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계절이다. 원고 쓰느라 새벽 서너 시까지 책상 앞에 쭈그려 있어도 좋고, 때로는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볕을 벗삼아 골똘히 명상에 잠길 때도 기분이 괜찮다. 그런데 도심(都心)에서 가을의 느낌이 어떤가? 서울에서만 살아온 지 30여년, 가끔 직장인들의 가을 푸념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 흙 안 묻히고 사는 화이트 칼라의 가을빛에도 단풍의 멋이 깃들던가? 지옥철이라는 지하철 출근에다, 1년에 단 며칠 휴가에 만족하며 몸과 정신에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하는게 도심의 직장인들이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커녕 아래 위, 좌우사방 눈치보느랴 빌빌거리기도 일쑤다. 모르긴 해도 아마 도시 사람들 중 태반의 중년 직장인들 꿈과 비애가 그렇지 않을까? 나 역시도 직장일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어디로든 훌쩍 달아나고픈 발작증세를 곧잘 일으키니 말이다. 그게 아무렴 가을철이니까. 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이들 속에 내던져질 운명을 탓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때론 턱밑까지 차오르는 무더위에 진저리를 치고, 또 때론 촌티 못벗는다고 핀잔을 받으면서도 버텨내야 하지 않더냐. 무슨 일에도 비교와 경쟁이 치뤄지는 전쟁 아닌 전쟁을 겪고 견뎌내는 게 도심의 직장인들 아니더냐.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니면서 아득바득대는 몸과 정신이 어찌 성할 수만 있겠는가.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 것이라고, 백년도 못살아 칠팔십이 고작이면서 더는 어쩌지 못할 만큼 물빨래가 돼 버리는 몸과 정신을 돌볼 겨를조차 못 가지는가? 몇 년, 아니 단 몇 달일지언정 주변과 비교도 경쟁도 하지 않고 살아봤으면, 쫓기지도 눈치보지도 않고 살아봤으면 좋겠다. 불볕 아래서 더위를 먹어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 몸도 머리도 한결 맑아지지 않을까. ‘남에게 이기려면 넓고 평탄한 길로 가지 말고 좁고 험한 길을 찾아서 가라.’ 이를테면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지니는 신념이 그럴 것이다. 남이 안하는 것, 남이 감히 생각지 못하는 것을 찾아 해내야 직장에서 오래 살아 남을 테니까. 여차하면 최하의 것이 최상이 되고, 최상의 최하가 되는게 직장인들의 꿈이요 허무가 아니랴. 어디 그뿐인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똑똑하고 약삭빠른 재주꾼들도 감히 못하는 일을 해내는 비결을 찾느라 머리다툼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하지 않더냐. 그래야 출세하고 성공하니까. 하지만 이제 그 출세도 성공도 그만 미워진다. 나이가 든 탓일까, 세상은 그래서 공평치 못하다. 새벽볔까지 탈고(脫稿)하지 못해 바둥대 본들 내게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때론 그렇듯 바둥댄 원고가 너무 못마땅해서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지고 마는데. 다시 9월이다. 모처럼의 가을 초대를 왜 거절할 것인가. 각시가 갈아입은 옷이 언제나 마음에 차듯이 차제에 나도 단풍이고 싶다. 푸른 하늘의 흰구름으로 뜨고도 싶다. 건들바람 살랑이는 시골 풍정이 그립고, 첫사랑의 솔이도 문득 떠오른다. 오늘 내가 이 가을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생애 언제쯤 빛깔로 네 가슴에서 쉬어갈 것이냐. 이쯤에서 그만 훌훌 털고 가을의 품에 안겨 숲길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