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인/한국신용정보(주) 대표이사 시드니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개껍질 모양의 오페라하우스와 아름다운 시드니 항구, 또한 강열한 태양을 떠올린다. 시드니의 상징물이된 오페라하우스는 덴마크 무명건축가 요른 우츠(Jorn Utzon)의 작품으로 당초 건축비 7백만불에 1959년부터 3년내에 완공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4년이 지난 1973년에 완공되었으며 총비용은 1억2천만불이나 소요되었다. 내부를 둘러보는 관광코스가 있으나 나도 아직 실내는 보지못했다. 세계에서 두번째 긴다리이면서도 균형감각을 갖춘 하버브릿지와 시드니항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곳에 아름다운 음악당까지 지어 너무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곳이 바로 써큘러키(Circular Quay)로서 1788년 호주이민선단이 최초로 도착한 곳이다. 만을 끼고 있어 바다물결이 잔잔하고 이주민들이 정착할 여건이 좋았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주거지와 관청, 하역시설, 창고 등이 들어섰으며 점차 세계적인 미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잘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당시 강제 이주한 죄수와 군인들이 먼저 둥지를 튼곳은 시드니의 록스(Rocks)라는 마을이었다. 이주민들이 도착했을 때 바위(사암)투성이었던 이곳은 자연 록스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주민들은 바위를 깍아내고 이곳에 주택, 병원, 학교, 상점, 술집, 은행 같은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사적지가 되어 관광객위주의 상점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옛날 동네가 슬럼화되듯이 이곳도 한때 슬럼지역을 면치 못하던 것을 시드니시가 이를 새로이 단장해서 관광지로 개발한것이다. 내가 들렸던 선물가게 여자주인은 클린턴 대통령이 올해 이곳에 들러 사간 물건이라면서 카우보이용 가죽혁대를 권하길래 클린턴이라는 말에 혹해 나도 하나샀다. 역사적인 장소라가에 들려보긴 했지만 여행안내서를 읽어보지 않고 가면 그냥 지나칠수 있을정도로 평범한 곳이다. 현지신문보도를 보니 호주에서도 요즘 초등학교 교육문제가 심각한 모양이다. 특히 읽고 쓰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 많은데다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역차별 문제까지 거론될 정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국민여론은 여학생 우대제도에서 남녀학생 평등 정책을 호소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처우개선, 한 학급당 학생수를 20명 이내로 해야한다는 여론이 지면 한면전체를 덮을 판이다. 자라나는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인데 이나라도 걱정이 보통 아닌가 보다. 시드니에는 한국교민이 많다. 이들중 대부분은 투자이민을 한 사람들이지만 초기이민자 대부분은 월남전 참전용사나 기술자들이 호주로 이민온 사람들이다. 또 월남전후 호주 정부가 백호주의 원칙을 깨고 많은 난민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월남인구가 많다. 그러다보니 시드니 어딜가도 월남 음식점이 많다. 월남음식점 중에서 내가 시드니에 가면 꼭 들리는 포하보(Pho La & Bo)라는 월남국수집(우육분계육분 牛肉粉鷄肉紛)이 있다. 닭과 각종고기로 달인 육수에 월남식 향료와 썬고추를 넣고 쌀국수에 숙주나물과 박하향 나는 나물등을 얹어서 말아먹는데 특유한 맛과 냄새가 한데 어울려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맛은 정말 일품이다. 한국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오는지 예전에는 유리창에 한글로 "월남국수"라고 써놓았었는데 지금은 확장하면서 그것도 없애 버렸는데도 여전히 손님이 많다. 시드니에서 먹어본 월남국수맛을 잊지못해 하노이에 갔을 때 현지국수를 시켰더니 그맛이 아니었다. 서울의 몇몇 베트남식당에서 먹어본 맛은 더더욱 그것이 아니었다. 시드니에 사는 초기 이민자 대부분은 월남전 패망당시 사이공에 기술자로 재직하다가 바로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월남에 오래 살다온 사람들이며 그러다 보니 사연들이 많다. 우리 친척중 한분도 본부인과는 별거하고 월남부인을 시드니로 초청해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자식들이 장성해 벌써 혼기에 달했다. 시드니에서 만난 고향친구 C군도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다. 그는 월남전 당시 주월사령부에 근무하다 비서실에 근무하는 꽁가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했다. 제대후 귀국하지 않고 현지 취업을 하여 이 여인과 살림을 꾸렸다. 원래 유치원 교사였던 이 여자는 외모도 준수했으려니와 교양까지 갖추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따름이지 아들을 둘씩이나 낳고 화목하게 살았다. 그러다 1973년 월남이 패망했다. 우리대사관이 철수하고 마지막 미군이 철수할때까지 친구는 이 가정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 대사관이 철수하는 밤 베트콩 간부로 일하던 그의 현지처남이 사람을 보내 부인과 애들은 곧 뒤따라 올것이란 말만하고 강제로 차에 친구를 태워 태국국경까지 실어다 주었다. 친구는 태국국경에서 부인과 애들을 기다렸으나 이들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처남이 친구를 생각해서 거짓말로 달래 내보낸 것이다. 후일 친구는 방콕을 거쳐 귀국했다가 호주로 이민갔다. 베트콩이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우리나라와 국교관계가 단절되자 가족들의 소식은 끊어졌지만 풍문에 부인과 애들이 잘지낸다는 소식만 듣고 또 실제 인편에 송금도 해주었지만 받았는지 여부는 알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 이녹과 아덴처럼 전쟁의 상처로 생이별한 이들은 친구가 현재 한국부인과 결혼하게되자 영원한 남이 되었다. 친구는 끝까지 부인에게 모든사실을 비밀로 했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있다. 그날저녁 친구와 나는 호주식 퍼브에 가서 어지간히 마셨다. 술이 어느정도 오르자 친구는 최근 월남에 다녀온 얘기를 꺼냈다. 최근 옛날 사이공에서 두사람 사이를 잘아는 빈 여사라는 여인에게 연락이 닿아 호지민시를 찾아 빈여사를 우선 만났다. 빈 여사는 부인과 장성한 아들 둘이 잘지내고 있으며 베트공 간부였던 처남은 지금 이곳에서 고관이 되어 조카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구는 물론 부인과 애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빈여사는 지금 다시 만나본들 둘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꼭 보고싶으면 집을 가르쳐 줄 테니 먼 발치에서만 보고 가라고 간절히 타일렀다한다. 친구가 빈여사와 그녀의 집앞에 갔을 때 대문밖으로 부인과 애들이 막 나오고 있었다. 꿈에도 자기 남편과 아버지가 자기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아! 얼마나 그리워하던 부인과 아이들인데…. 나는 막 친구를 나무랐다. 왜 만나서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누구의 판단이 옳은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의 아들이 현재 월남 여학생과 사귀고 있다니 이것도 업보인지! 나는 그날 밤 내내 내 일인양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