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안과의 전쟁- 백인들이 신대륙에 처음 상륙하여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 때 이들을 최초로 도와준 것은 인디안들이었다. 그들은 옥수수와 호박 같은 양식을 보내주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백인들에게 약초를 제공해줬다. 그러나 백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점차 서부로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인디안들과 부딪치기 시작했다. 문명의 이기를 가진 백인들의 눈에는 평원에 흩어져 사는 인디안 무리들이 야만인으로 보였으며 그들은 탐욕의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디언들의 입장에서는 수백년간 살아가던 자기의 영토에 어느날 백인들이 나타나 자기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적군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남북전쟁후 미국정부는 인디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제를 공포했으며 인디언 보호구역을 정하고 면허증을 소지한 백인에 한해서 이곳을 출입 할수있게 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상행위는 인정했지만 술이나 말, 토지를 사고 팔수 없게 했으며 인디언구역에 백인들이 정착 할수도 없게 규제했다. 미의회는 인디언들에게 적당한 가격으로 생필품을 파는 것을 장려했으며 교역장소를 지정하여 주기도 했다. 이는 인디언 보호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교역을 통해 백인들이 상업적 이익을 얻는데도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다른법이다. 땅에 욕심이 난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영토를 탐내기 시작했으며 정부도 인디언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기보다는 항상 백인들의 편에 서있었다. 재판에 회부되어도 항상 법원은 백인의 편에 서있었다. 양쪽의 의도와는 달리 이들 두세력의 충돌은 피할수 없이 되어갔다. 제퍼슨대통령이 불란서로부터 루이지아나 영토를 매입한 이후 루이스와 크락을 탐험대로 파견했음은 전편에 얘기한 바 있다. 이들은 인디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보다 많은 백인들이 서부로 서부로 밀려들어가자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점차 잦아지기 시작했다. 백인들은 문명도 가져왔지만 질병도 함께 이들에게 전했다. 면역이 약한 인디언들은 쉽게 마마나 홍역, 감기에 감염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백인들은 판매 금지된 술과 총을 이들에게 팔았으며 인디언 영토에 오두막을 짓고 살기까지 했다. 루이스와 크락이후 처음 인디언들은 간헐적으로 백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인의 공격은 이보다 훨씬 잦아지기 시작했다. 양편의 싸움이 잦아지고 또 치열해지자 미국의회는 미주리 서쪽과 텍사스 북쪽의 광대한 땅을 인디언 주거지로 지정하였으며 1810-20년대 실제 많은 인디언들이 지금의 켄사스와 오크라호마지방에 정착했다. 특히 이때 5대부족인 체로키, 촉토우, 치카소, 크릭, 세미놀이 이지방으로 이주하였며 이들이 사는 지역은 눈물의 통로가 되었다. 미국정부는 이곳에 세개의 요새를 추가로 건설하여 백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집중 주거지역을 통한 서부로의 이주가 어려워지자 백인들은 북부통로와 남부통로를 주로 이용하여 이동했다. 멕시코전쟁이 일어나자 인디언들이 일어나 뉴멕시코지방의 타오를 공격하였다. 백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푸에브로 인디언들을 공격하여 150여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을 받아냈다. 1830-40년경에 북쪽 루트에도 사고가 잦았다. 1847년 1월에 싸이우스인디언이 선교사인 마르쿠스 위트만 부부를 비롯한 십여명을 살해하고 50여명을 인질로 데려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인들은 금방 보복에 나섰다. 사고가 잦아지자 미국정부는 이주자들의 이동시 군대가 이들을 보호하고 차차 보다 안전한 기차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서부개척 방침이 강화될수록 인디언들과의 부딛침이 잦아졌으며 그들의 저항 또한 거세어 졌고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병대가 투입되면서 인디언 인구도 급격히 줄어 들기 시작했다. 총에 맞아죽은 인디언보다 백인들에 의해 감염된 바이러스 때문에 죽은 인디언들이 훨씬 많았다. 일부종족은 항복했으며 일부종족들은 현실과 타협하여 동화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은 끝까지 저항했다. 일부 용감한 인디언 전사들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했으며, 후일 영화화 되기도 했다. 백인들의 눈으로 보면 인디언들의 전투는 무모하기까지 해 보였다. 그들은 단체작전을 하기보다 전사중심의 독자적인 전투를 했으며 전사가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하는 형식이었으며 추장과 평화협약이 맺어지더라도 협약은 이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처음 활과 창으로 용감히 백인들에 맞섰다. 용감한 전사가 30명 이내의 부대를 인솔하고 그들 고유의 노래를 부르며 싸움을 걸었다. 인디언들은 텍사스의 리오그랑데, 엘파소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켄사스, 다코다, 네브라스카 켄사스, 유타, 오레곤, 켈리포니아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주로 시욱스, 체옌, 아라파호, 키오와, 코만치족들이었다. 어떤 특정한 날에는 인디안들이 정해진 장소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옷이나, 식량, 선물 등을 받기 위해 나타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인디언 보호지역을 지정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했지만 문화적으로나 사회적, 정서적으로 이들은 정착에 한계가 있었다. 1854년이 되어서야 텍사스 일부지역에 인디언의 일부 무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에 켈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방등에 이러한 무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854년 8월18일 일단의 인디언 무리들이 라라미요새에 시욱스인디언이 자기 가축을 죽였다고 신고했다. 이튿날 기병대 장교 한명과 사병 30명이 신고를 받은 인디언거주지로 출동했으며 이들은 범인을 내어 놓지않고 오히려 기병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다. 이때 장교를 포함한 모든 기병대가 몰살 당했으며 부상자 한명이 살아남아 간신히 라라미요새에 이사실을 알리고 그도 곧 부상으로 인해 숨졌다. 기병대들은 병력을 증파하여 브룰레 시욱스 근거지를 공격하여 인디언들을 살상하고 가옥을 파괴하였으며 시욱스의 항복으로 간신히 평화가 다시 정착됐다. 1856년 여름, 이번에는 체옌 인디언이 반란을 일으켰다. 기병대장이 말의 소유권 문제로 인디언 세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부터 7월까지 군인들은 켄사스에스 드레이트까지 소탕전을 벌였으며 7월27일 코로라도 동부지방에서 대회전이 벌어졌다. 기병대가 대열을 벌려 진격했을 때 처음 인디언들은 이들을 기다리다가 정면으로 쏜살같이 되받아 쳤다, 이 싸움은 체옌인디언들의 패주로 끝났다. 그들 대부분은 사로잡히거나 부상을 입었다. 텍사스 남부지방에는 키오와와 코만치 인디언들이 준동했다. 기병대는 대규모 소탕전을 벌렸으며 1860년까지 지속된 싸움에서 코만치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49명은 전사했으며 300여명은 캐나다 지방으로 월경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도처에 퍼져있는 인디안들과의 분규는 끊임이 없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종족끼리도 연합하지 않고 동족안에서도 통일된 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내키는데로 행동했다. 1862년 라코탄과 시욱스인디언들에 의한 대규모 반격이 있었다. 그해 8월 몇 명의 젊은 인디언들이 미네소타에 정착한 백인 다섯명을 죽였다. 그날밤 이들은 추장인 작은 까마귀와 백인들과의 한판 싸움을 결의하였으며 이튿날 이들은 인근 농장과 소규모 주거지에서 백인 400여명을 죽이고 이것도 모자라 이들을 난도질 하였다. 소식을 듣고 출동한 리쯔리켐프의 기병대도 반이상이 죽고 나머지 반 정도가 켐프로 간신히 돌아왔다. 이튿날 시욱스인디언 800여명은 180여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는 리쯔리켐프를 공격하여 이틀동안 공방전을 벌렸으며 군인들은 대포를 쏘며 간신히 버틸수 있었다. 이사건으로 민간인 800여명이 사망했으며 수백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백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도시로 나가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곧 1500여명의 무장민병대가 조직됐다. 9월23일 이들중 700여명이 출동하였다. 이들의 출동에 즈음하여 인디언들 내부에 분란이 생겨 수백명의 인디언들이 항복을 하였으며 이들중 백인을 죽인 사실이나 혐의가 있는 300여명의 인디언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으나 링컨대통령의 최종 사면으로 그수는 40명으로 감원되었다. 대부분의 인디언들이 항복할때도 일부 적개심이 강한 인디안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작은 까마귀를 비롯한 전사들은 다코라의 원시림속으로 들어갔다. 1863년 1900여명의 기병대들이 1600여명의 시욱스 인디안들을 포위했으나 패주했다. 9월3일 알프레드 술리가 인솔한 400여명의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4000여명의 시욱스 인디언들에게 오히려 포위당했다. 만약 이때 인디언들이 이들을 바로 공격하였다면 백인 민병대들은 몰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디언식으로 포위망을 좁히며 시간을 끌었다. 이시간은 백인들의 후원군이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며 이로써 역습을 받은 인디언들은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이듬해 여름 술리는 부대를 인솔하여 미주리로 다시 진격하였으며 킬디어마운틴에서 2000여명의 인디언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이튿날 살아남은 인디언들은 패주했다. 더욱 큰 전과는 인디언들이 식량을 고스란히 포기한채 도주한것이었다. 이것은 수백명의 인디안들을 사살하는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었다. 이후 미네소타에서의 백인 대학살에 대한 소문은 일부백인으로 하여금 과잉 진압을 하게끔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직 목사였던 죤 시빙톤 대령의 경우인데 그는 병적인 거짓말쟁이였으며 그의 잔인함은 1864년 미의회의 조사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가는곳마다 인디안들을 죽이고 방화하였으며 이로인해 일부 평화적인 체옌인디언들을 몹시 흥분시키고 말았다. 이후 체옌에 동조한 일부 키오와 와 코만치, 아라파호인디언들은 켄서스와 코로라도에 걸쳐 복수작전을 펼쳤다. 겨울이 오자 검은주전자와 같은 추장이나, 체옌부족들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때 유독 덴버사람들은 전의에 불타 오르고 있었으며 때맞춰 시빙턴은 광부들로 구성된 코로라도 제3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인디언들은 평화를 원하였으나 백인들의 전쟁에 대한 휘슬은 불었다. 검은주전자는 수백명의 체옌 인디안들을 샌드크릭 캠프로 데려와 절절한 항복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빙턴은 이를 알면서도 11월29일 아침 700여명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검은주전자의 인디언 켐프를 공격하여 500여명의 체옌과 아라파호 인디안들, 특히 아녀자들까지 몰살하였다. 결과는 피비린내로 얼룩졌으나 시빙턴 같은 미치광이 정신병자들에게는 대만족이었다. 일부 전사들은 이들에게 대항했으며 나머지는 도망을 쳤다. 그러나 광란의 백인들은 이들을 끝까지 따라가 200여명의 인디언들을 도륙하였으며 시빙턴은 큰 전공이나 세운것 처럼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미국의회는 마침내 이 끔직한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으며 결론은 야만적인 잔인한 살육행위 로 결론을 내렸다. 1865년 인디언과의 전쟁은 더욱 맹열해졌다. 공화주의자들 마저 감옥에 있는 죄수들도 인디언들과 싸우겠다면 방면하고 부대원으로 편입시켰으며 이들은 도금된 얭키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1805년 1월 1000여명의 시욱스와 체옌인디언들이 덴버 정부 양곡창고와 마차정거장, 전신국등을 점거했으며 덴버를 완전히 고립시켰으나 이들은 곧 이곳을 떠났다. 미국정부는 죤 폽장군을 파송하였으며 그는 키오와,코만치 아라파허, 체첸야, 시욱스 인디안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모든 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저항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으며 정부가 추구하는 평화는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오히려 100여명의 인디언들을 없에는데 2천만불이라는 거액의 예산만 낭비했을 뿐이었다. 이는 워싱턴으로 하여금 큰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서부지역에 정착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남부지역의 정부 패전으로 인한 가옥과 농장의 파괴는 서부지역으로의 이주를 더욱 부추기었다. 4년간의 내전은 국민들로 하여금 준법정신을 상실케 했으며 민심은 더욱 각박해졌다. 군인구는 줄어들고 국방비는 삭감되었으며 정부로서도 평화정착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인디언들과의 평화정착에 대한 필요성도 전쟁전보다 심각했다. 나날이 많은 서부지역이 백인들에 의해 개척되어지고 정착되기 시작했으며 인디언들은 점차 외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인디언들은 점점 참담해지기 시작했다. 시욱스의 늙은추장 곰의갈비는 1866년 협정체결을 위한 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이 땅이 누구의 것이냐? 나는 이것이 내것이라고 믿는다. 당신들이 나에게 한 필지의 땅을 요구한다해도 나는 이를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땅을 너무 사랑한다. 이 모든 땅, 이 강의 양안이 모두 나에게 속하며, 내 형제여! 당신들이 나에게 이를 요구한다해도 나는 정말 이땅을 사랑하기에 당신들에게 주지 않을것이다. 진정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다오 이당시 광대한 서부지역에 20만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으며 이중 5만여명은 백인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내전후 이지역의 백인 기병대는 2만여명이 110개의 기지에 분산되 있었다. 이후 군인의 인구는 늘어났으며 1890년까지 25년간 24건의 인디언과의 전투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전투에서 우수한 무기덕분에 백인들이 이길수 있었다. 그러나 1866년 12월21일 미친말이라는 시욱스 인디언 추장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전투에서 포트필커니에 있는 모든 백인 기병대를 마지막 한명까지 몰살시켰다. 그는 미주리에서 북다코다까지 또 서부로는 옐로스톤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시욱스와 체옌인디언의 지도자였다. 이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위해 7기병대의 암스트롱 케스터 중령이 600여명의 병력으로 2000명 또는 그 이상의 인디언 부락을 세팀으로 나누어 침공했다가 그가 인솔하던 215명 전원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오직 살아돌아온것은 장교가 탔던 말 한마리가 전부였다. 이 전투는 인디언들이 이룩한 마지막 금자탑이었다. 이후 인디언들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며 자기들끼리 연대를 이루지도 못했다. 용감했던 인디언 추장 죠셉의 마지막 백인과의 싸움은 눈시울을 적시기까지 한다. 네즈퍼스라는 인디언 부족은 언젠가부터인지 알수 없으나 오레곤의 왈로와벨리지역에 오랫동안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백인들이 이 평화로운 고장에 몰려오기시작하자 이들에게 아이다호로 이주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은 백인들과 협상도 해보지 못하고 군일들에게 내몰려 아이다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도에 이들은 방향을 바꿔 록키산맥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했다. 군일들은 이들의 뒤를 쫗기 시작하자 인디언들은 몬타나쪽으로 향했다. 군인들에게 한달이나 쫓긴후 마침내 이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포위를 당한지 닷새째 되는날네스퍼스록의 지도자인 죠셉은 항복을 했다. 그는 말했다 대장이여 들으시오. 나는 지쳤소, 나의 심장은 병들었고 슬프답니다. 지금 해가 어디서 떠오른다해도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을것이며 영원히 싸우지 않을것입니다 이후 1870년대에 반녹이나 파이우트, 쉽피터와 유트같은 종족과의 싸움이 있었다. 1879년 아파치추장 제로미노의 싸움은 백인들과의 마지막 싸움이되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을 뛰쳐나온 제로미노는 남서부지역에서 테러행위를 했다. 그의 만행은 5년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항복한 이후 그와 그의 부족들은 인디언 부족과 너무나 거리가 먼 프로리다, 그리고 아라바마, 포트실, 오크라호마 등으로 이주되어졌다. 이후 거의 20년이나 지난뒤 뉴멕시코로 다시 이주되었다. 제로미노의 패배이후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에 정착하거나 도시로 진출해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약 한세기에 걸친 저항이후 이들은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온순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용감한 인디언전사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정든 땅을 떠나 척박한 땅으로 이주해 옛날을 그리워하며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