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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東 云/혜천대학 세무회계과 교수 정말 천국이 존재한다면 거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아이들일 것이다. 우리는 나이를 들어갈수록 점점 더 천국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고,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지 ‘신발 한 켤레를 잃어버리고 남은 한 켤레를 번갈아 바꿔 신어야 하는’, 마치 우리네 1960년대를 연상시키는 궁핍함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음은 물론, 사랑이 가득 차 보는 이들에게 행복한 마음을 안겨준 ‘천사’와도 같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바로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이다. “이 영화를 나의 아버지, 할머니, 내 어린 시절에 바칩니다.”라고 말한 감독은 5개월 동안 하루의 10시간 이상을 [천국의 아이들]의 시나리오를 쓰는데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과 네 명의 형제가 한 방에서 살았을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가난 속에서도 예배에 쓸 설탕을 절대 손대지 않고 차에 사탕을 넣어 마시는 영화 속 아버지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바로 자신의 삶의 조각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테헤란 남쪽의 가난한 가정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생 알리(미르 파로크 하스미안). 엄마의 심부름으로 여동생 자라(바하레 시디키)의 한 켤레뿐인 분홍색 구두를 수선하여 비닐봉지에 넣고 돌아오는 길에 야채 가게에 들러 감자를 사던 중, 가게밖에 둔 구두를 고물 장수 아저씨가 가지고 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부모에게 구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는 없다.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고 식료품도 외상으로 사야하며, 집세까지 밀려 있어서 자라의 신발을 새로 사줄 형편이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넌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9살이나 됐잖아. 내가 네 나이 때는 부모님을 도와드렸어.”라며, 꾸짖는 무서운 아빠(아미르 나지)에게 혼날 게 뻔하다는 것도 큰 이유겠지만, 알리는 부모님께 제발 이르지 말라고 글썽거리며 동생에게 애원한다. 자라는 당장 내일 학교에 어떻게 가냐며 눈물을 글썽거리지만, 투정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어린 자라의 눈에는 맑은 이슬방울들이 맺힐 뿐이다. “제발 엄마, 아빠한테 얘기하지마. 지금 나가서 찾아 올께.” 그러나 잃어버린 구두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까봐 둘은 필담을 나눈다. 아빠한테 이르면 신발 사주실 돈이 없으므로 우리 둘 다 매 맞고, 구두를 잃어버린 것도 신의 뜻이라면서 운동화를 같이 신자고 한다. 결국, 알리는 새 연필을 주고 설득에 성공한다. 이렇게 하여 오전반인 자라가 알리의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그 신발을 몰래 갈아 신고 학교에 간다는 어린 남매사이의 비밀스러운 약속이 맺어진다. 더럽고 낡고 큰 운동화를 신은 자라는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체육시간에 주춤거리지만, 구두를 신고 뛰면 넘어지기 쉬우므로 운동화를 신고 넓이 뛰기를 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앞으로 나서며 안도의 미소 짓는다. 그러나 운동화가 너무 더러워 신고 싶지 않다는 자라의 제안에 같이 빨기로 한다. 운동화를 빨던 남매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비눗방울 놀이를 시작한다. 마당 구석구석 찌든 가난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만들어내는 비누방울은 영롱하게 반짝이며 날아다닌다.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서 혼자만의 즐거움을 느끼지만, 남매의 순수한 모습이 투영된 우리 세대의 아름다운 놀거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매의 약속은 생각만큼 쉽지 만은 않았다. ‘신발 바꿔 신기’를 하다 보니 알리는 학교에 지각하기가 일수이고, 방과 후 함께 공차기를 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에도 엄마가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 버린다. 언제 다 떨어져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낡은 운동화를 동생과 함께 신어야 하므로…. 그러다가 오빠가 지각할까 걱정돼 시험문제도 푸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약속장소로 달려오다가 운동화가 벗겨져 개천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한다. 너무 늦게 왔다고 나무라는 오빠에게 자라는 운동화가 너무 커서 그랬다면서 아빠에게 이른다고 말한다. 이 일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늦게 학교에 온 알리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교실로 들어가려다가 교장선생님에게 들키게 되고,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이리저리 핑계를 댄다. 공부도 공부지만 둘 사이에 약속이 깨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그리고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물론 부모님께 입막음하기 위해, 성적이 올라 선생님에게서 선물 받은 샤프를 자라에게 준다. 그러자 하찮아 보이는 그런 작은 선물에도 기뻐하며 자라는 약속을 다짐한다. 알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 이후, 알리는 또 지각을 해 교장 선생님의 진노를 산다. 책임감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를 맞지만 담임 선생님 덕택에 간신히 모면한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오빠를 위해 동생을 위해 필사적으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남매의 모습이 계속 비춰진다. 그러던 어느 날, 자라는 전교생이 모인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뒤를 밟는다. 자라는 오빠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오빠와 함께 구두를 돌려 받기 위해 그 애 집에 찾아간다. 그러나 장님 아빠의 손을 잡고 행상을 나가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남매는 구두를 돌려 받기를 포기한다. 자신들 보다 더 어렵게 사는 아이에게 구두를 돌려달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라의 구두를 신은 그 아이는 나중에 우연히 자라가 흘린 샤프펜슬을 줍고, 무척 탐이 났지만 돌려준다. 그 아이도 자신의 구두가 자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돌려줄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일로 인해 둘은 친한 사이가 된다. 이러한 어린 아이 신발 하나를 사려고 해도 빚을 내야하는 어려운 생활 형편 때문에, 아빠는 부업으로 정원사일을 하게 된다. 휴일날 아빠와 알리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일거리를 찾아 대 도시에 나간다. 그 도시 주변의 으리으리한 빌딩들은 알리의 가족이 사는 서민 주택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란의 이러한 빈부격차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지만 모두들 문전박대(인터폰 통화)를 당하고 그들의 집을 지키는 개들을 피하는 장면을 통해 계층간 단절을 암시해줄 뿐이다. 이곳 저곳 문을 두드리다가 마침내 정원 일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인터폰으로 대화를 나눈 알리 보다 한참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에게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호화주택에 살고 있는 아이는 너무 심심하여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에 알리는 경제적으로 빈곤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착한 마음과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비참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 대 저택에 사는 부유층을 보고서도 이질감과 배타성을 갖지 않는다. 부자집 아이를 마치 동생처럼 데리고 노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밀린 집세를 받으려고 집 주인이 찾아 왔었다는 부인의 말을 듣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신의 뜻이라는 아빠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일당을 넉넉히 쳐주는 부자집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빈부격차를 느끼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만 알리와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일거리를 찾아가던 도로에서 마주한 차량들의 행렬은 알리 부자의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며, 정원 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가 브레이크가 고장나 엉망이 몸을 덜컹거리는 차에 맡기고 돌아오는 이들의 그늘진 삶에 비애가 스며 나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이 착하기만 한 남매가 언제까지 신발을 나눠 신어야 하는 고통을 계속해야 할까? 그 때 운동화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전국 어린이 달리기 대회에서 3등을 하면 상품으로 운동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알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체육선생님에게 간절히 애원한다. “전 누구든 이길 수 있어요. 정말 이 대회에 나가야 해요.”라는 알리의 간청에 설득 당한 선생님은 테스트를 한다. 매일매일 골목을 누비며 ‘신발 바꿔 신기’로 단련된 알리에게 이쯤은 식은 죽 먹기다. 알리의 달리기 실력에 놀란 선생님은 그를 학교 대표로 내보낸다. 대회에 나가게 된 알리는 자라에게 약속한다. “내가 3등하면 운동화 너 줄게. 난 꼭 3등 할거야.”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에서 몰려온 많은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며 격려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의기소침하지만, 낡은 운동화 끈을 꽉매며 꼭 3등하리라 다짐한다. 알리는 오로지 동생에게 새 운동화를 안겨 주기 위한 일념으로 마라톤 대회에서 3등을 하고자 했지만, 그의 소원과는 달리 3등이 아니라 1등을 해버린다. 알리의 목적은 동생에게 운동화를 선물로 주고자 하는 순수한 것이었지만, 감독은 그와 관객에게 기쁨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을 하고자 질주하는 알리의 모습’과 ‘1등을 하려고 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간발의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느린 동작으로 반복되는 모습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같은 곳을 향해 뛰지만 그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느린 동작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우리 네 삶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축하해주지만 알리에게는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아픔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집에 돌아온 ‘알리’의 시무룩한 표정, 미안함과 실망 어린 표정을 보고 3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자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기가 울자 아기를 보러 방에 들어간다. 혼자 남겨진 알리는 밑창이 뚫린 헌 운동화로 달리기를 하느라 퉁퉁 붓고, 물집투성이가 된 발을 물 속에 담근다. 그러자 주홍빛 금붕어들이 알리의 발을 서서히 감싼다. 알리의 노력과 아픔을 물고기들이 치유해주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한편, 어렵게 번 돈으로 아빠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그 속에는 두 남매의 새 신발이 놓여져 있었다. 가난한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고 버려도 될 만큼 낡아빠진 운동화를 번갈아가며 신고 달렸던 그 순진무구한 남매에게 새 신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이렇게 [천국의 아이들]에서는 ‘장발장’식의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죄를 저지르게 되는 찌들린 현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궁핍한 생활에 대해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에 넣을 설탕이 떨어졌어도 앞에 가득 쌓인 설탕뭉치는 자기 것이 아니므로 먹어서는 안 되며, 설탕뭉치를 예배 때 쓰기 위해 조각 조각으로 자르는 일을 자신을 믿고 맡겨준 것이라고 말하는 아빠, 아픈 몸을 이끌고 만든 스프를 이웃에게 나눠주는 엄마, 엄마의 병을 걱정해주고 답례를 하는 이웃사람, 자신의 구두를 자신 보다 가난한 소녀가 신고 있음을 알고 돌아서는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자라, 동생을 위하여 달리기 대회에 참가한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알리, 자라가 잃어버린 샤프를 돌려주는 소녀…. 이들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은 경제적인 풍족함을 떠나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거듭된 곤란한 사건과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황에서도 영화 속의 ‘아이’는 희망의 다른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신발’을 찾을 수 있었지만, 양보할 줄 알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새 신발’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새 신발이라는 희망적인 미래는 착한 부모가 이끌어준다. 그러기에 이 영화는 ‘정직한 가난은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지금보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큰 행복감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필자 역시 경험하며 자랐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한 천사들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 영화의 주제를 ‘행복’이라 규정하고, 행복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행복추구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사랑과 함께 인류가 지속되는 한 가장 빈번하게 추구되어 왔던 문제이다. 그러면 이 행복은 어떻게 정의될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행운’, ‘복’, ‘행복’이라는 말들은 그 의미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사용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동양(우리 나라)과 서양에서의 의미를 대비하여 살펴보자. 동양에서는 행복이란 말보다 예로부터 ‘복’이라는 말이 쓰여져 왔는데, 이 복(福, 복 복?착할 복?아름다울 복, blessing)자 중에서 시(示=?, 보일 시?땅 귀신 기)자는 제단을 본뜬 글자인데, 이것이 부수로 쓰일 때는 ‘보이다’라는 뜻과는 무관하고, ‘제사’라는 뜻으로 쓰이므로, 신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의 형상을 본뜬 글자로 쓰인다. 따라서, ‘술과 재물을 신께 바치고 빌면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즉,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과 같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숙명론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영어로 행복은 ‘happiness’인데, 이는 동사 ‘happen’에서 온 것으로, 이 ‘happen’의 뜻은 옳은 일은 자기자신으로부터 생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행복은 내적 행위이든 외적 행위이든 간에 올바른 행위의 성과이고, 행복의 원인은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다(박선목,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동서양의 행복론”, 부산대학교 {인문논총}, 55, 2000. 6. 참조). 그러면 우리 나라의 경우와 서양에서의 개념을 좀더 살펴보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편, 어문각, 1999)에 정의된 내용을 살펴보면, ‘행운’은 ‘좋은 운수 또는 행복스러운 운명’으로 정의하였고, ‘복’이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행복’은 ‘① 복된 좋은 운수, ②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 중에서 ‘행운’이 숙명론적인 의미로서의 ‘복’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행복론이 처음 제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행복에 대해 정의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① 행복은 행위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는 좋음 중에 가장 궁극적인 것이다. ② 행복은 훌륭한 행위를 지칭한다. ③ 행복은 인생 전체에 걸친 행동이다. ④ 행복은 자족적인 것이다. 행복은 결여된 것이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삶이다.’(김선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따라서, 그가 말한 행복은 어떤 무엇을 소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 권력, 건강 등이 행복을 위한 외적인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다. 어떻든 그에게 행복은 인생의 최고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최종적인 척도이며, 도덕적 원칙인 것이다(김양현, “행복에 대한 서양인의 고전적 이해”, 전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용봉논총}, 28집, 1999.). 이렇게 볼 때, 동양이나 서양이나 행복은 ‘행위의 결과로서의 만족감’이라고 할 수 있다. 20여 년 전에 배운 중학교 영어 교과서 삽화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교회를 짓는데 세 사람의 석공이 와서 날마다 대리석을 조각한다.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고 물은 즉, 세 사람의 대답이 각각 다르다. 첫째 사람은 험상궂은 얼굴에 불평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죽지 못해서 이놈의 일을 하오.”하고 대답한다. 둘째 사람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돈 벌려고 이 일을 하오.” 그는 첫째 사람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불평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별로 행복감과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셋째 사람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한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대리석을 조각하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 안병욱의 {행복의 메타포} 중 “세 사람의 석공(石工)”에서 그의 글을 좀 더 살펴보자. 똑같은 달을 바라보면서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혹은 슬프게 혹은 정답게 혹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행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체를 쓰고 사는 정신인 이상, 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누구든지 먹고살기 위한 의식주와 처자와 친구와 명성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돈, 건강, 가정, 명성, 쾌락 등은 행복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과 행복의 조건을 갖는다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해야 할 별개의 문제다. 집을 지으려면 돌과 나무와 흙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갖추었다고 곧 집이 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감을 떠나서 행복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좋은 가정을 갖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면서도 불행한 사람, 또 그와 반대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별로 갖지 못하면서도 사실상 행복한 사람이 있다. “황금은 어리석은 자를 잘난 자로, 겁쟁이를 용기 있는 자로, 도적을 귀족으로, 그리고 창녀를 숙녀로 만든다.”(셰익스피어) 그의 말 그대로 돈이 있다면 많이 있을수록 더 좋다. 그렇다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돈이 불행의 고통을 덜어주기는 쉽다. 실제로 영국 런던정치대학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나라는 방글라데시다. 3위 나이지리아, 5위 중국이며 한국은 23위, 일본은 44위, 미국은 46위였다. 이걸 보더라도 행복은 분명 성적순도 아니지만 국민소득순도 아니다(만물상, 조선일보, 2003. 1.25. 30면). 그러면 실제적으로 한국인은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동아일보사에 발행한 {주간동아}에서 실제로 전국 642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을 소개한다(전원경,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 한국인 평균 행복지수는 64.13점”,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371호, 2003년 2월 6일).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주간동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100점 만점에 64.13점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남녀간의 차이는 거의 없었지만 나이와 지역별로는 차이가 적지 않다. 10대의 행복지수가 71.43인 반면, 20대가 느끼는 행복지수는 그보다 10점이나 낮은 61.94에 불과하다. 또 경기?인천 지역의 거주자들은 59.17의 낮은 점수를 보였지만 강원도 거주자들은 70.25로 전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 설문 응답자들 중 남자는 372명, 여자는 270명이었으며 지역별로는 서울이 가장 많아 254명, 경기?인천이 139명, 충청도가 44명, 전라?제주도가 78명, 경상도가 112명, 강원도가 12명 등이었다(3명은 지역 밝히지 않음.). 또 나이별로는 10대가 16명, 20대가 138명, 30대가 225명, 40대가 177명, 50대가 65명, 60대 이상이 20명이었다(1명은 나이 밝히지 않음.). 응답자 전원의 행복지수 평균은 64.13이었다. 행복지수란 객관적인 자료가 아니라 개개인의 지각이 느끼는 대로 응답한 주관적 자료이다. 이 지수만으로 보면, 행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경제력과 친구 등 대인관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64.13이라는 전국 평균점수는 한국인들이 대체로 행복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대학 세무회계과 학생들의 결과도 첨부하였는데, 질문 3에 대한 응답이 5.90으로 가장 낮았는데, 아마 4년제 대학생들이었다면 이 보다 높았을 것이라 추측되며, 그들에 비해 전문대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크다는 반증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행복지수는 62.10으로 주간동아의 평균보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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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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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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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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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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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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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642명) |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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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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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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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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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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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372명) |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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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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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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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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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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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270명) |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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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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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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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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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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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254명) |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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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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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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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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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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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인천(139명) |
6.05
|
6.37
|
5.80
|
5.90
|
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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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44명)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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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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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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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
6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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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112명) |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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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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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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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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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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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제주(78명) |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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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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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
|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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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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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12명) |
6.75
|
8.08
|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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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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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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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회계과 학생(62명)* |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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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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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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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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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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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혜천대학 세무회계과 학생들의 자료로, 2003년 9월 30일 필자가 조사한 결과임.
이는 2003년 1월 6일 영국 BBC 방송이 보도한 ‘행복공식(Formula for happiness)’이란 행복의 각 조건을 조사해 이를 100점 만점으로 환산할 수 있는 계산법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캐럴 로스웰과 전문 상담가 피트 코언은 1000여명의 영국인에게 80가지의 문항을 주고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건들을 고르라고 주문했다. 두 사람은 이 조사의 결과로 ‘행복공식’을 창안해냈다. 행복=P+(5×E)+(3×H) 행복지수의 계산법은 간단하다. 아래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해 각각 10점 만점으로 대답한 후 1, 2번의 점수를 합산해서 P에, 3번을 E에, 4번을 H에 넣은 뒤 행복공식에 대입하면 된다. 각 질문에 대해 ‘전혀 아니다’면 0점, ‘확실히 그렇다’면 10점, 그 중간이면 정도에 따라 1~9점 사이로 대답한다. 만점은 100점. ① 당신은 사교적이고 원기왕성하며 변화를 잘 받아들입니까? ② 당신은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실패해도 빨리 일어섭니까, 또 삶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습니까? ③ 건강과 돈, 안전, 선택의 자유, 공동체의식 등 삶의 기본적인 욕구가 잘 충족되는 편입니까? ④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주위에 많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편입니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이 공식에서 P(Personal Characteristics)는 개인의 인생관, 스트레스에서 빨리 회복하는 탄력성,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적응력을 나타낸다. 두 번째 요소인 E(Existance)는 생존의 기본적 요소인 돈, 건강, 친구 등을 의미한다. 행복공식에서 E에 5를 곱한 것은 공식 창안자들이 이 항목을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H(Higher Order)는 보다 고차원적 욕구, 즉 개인의 자존심이나 야망 등을 의미한다.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자신의 욕구이론에서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는데, H는 이 5단계 욕구 중 각기 4, 5단계인 자존심과 자아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괴테는 행복한 생활에는 8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즉, ‘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 ② 기본적인 생활조건을 충족시킬만한 경제적 여유, ③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만한 힘, ④ 좋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하는 인내력, ⑤ 이웃을 돕는 자비심, ⑥ 장래에 대한 불안을 이겨낼 만한 희망’ 등이다. 이러한 행복의 조건 외에 그 척도를 살펴보기 위해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인간의 가치에 관련된 개념이므로 어떤 것이 질 높은 삶이냐 하는 문제는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 즉, 경제학자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 사회학자는 ‘사회적 자원이 풍부한 삶’, 의료전문가는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한 삶’, 환경론자는 ‘주변 환경적 요소가 쾌적하고 우호적인 곳’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이다. 또 많은 학자들은 ‘주관적 느낌’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따라서, 삶의 질을 ‘주관적?심리적 안녕(well-being)’, ‘행복감’, ‘생활만족도(life satisfaction)’, ‘사기(morale)’ 등과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김애련, “노인의 삶의 질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1.).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아름다운 생활을 설계할 수 있는 것, 즉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이규태, “이규태 코너(4883) - 삶의 질”, 조선일보, 1999. 7. 2. 7면 참조). 플라톤은 ‘① 하고싶은 수준보다 조금 못다 쓰고 못다 입으며 못다 사는 정도의 재산, ②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는 품성과 용모의 아내, ③ 자만하고 있는 것의 절반밖에 알아주지 않은 명예, ④ 두 사람한테 이기고 한사람한테 지는 정도의 체력, ⑤ 청중의 반수만이 손뼉을 치는 웅변력’을 들었다. 즉, 적당히 모자란 재력과 재능을 지니고 열심히 사는 것이 희랍의 삶의 질이었다. 조선조의 삶의 질은 스스로의 분에 만족하는 자적이었다. 조신의 자적시에서 완연하다. “아 나는 가는 곳마다 자적하네 / 몸이 천하므로 작은 벼슬도 영광이요 / 집이 가난하므로 박봉이라도 원망않네 / 거처하는 곳은 무릎만 들이면 되고 / 음식은 배만 부르면 좋고 / 술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 / 혼자면 자작 둘이면 대작 / 시는 잘 지어 뭣하리 내 뜻이나 담으면 그만 / 글도 노곤하면 그만 읽고 자고 마니 / 이것이 모두 나의 자적이로세.” 그리고 퐁피두는 정치란 국민의 삶의 질(칼리테 드 비)을 높이는 일이라 하고, 다음 여덟 가지를 내세웠다. 즉, ‘① 주급을 절약 주휴 2일을 근검하게 즐길 수 있을 것, ② 주간에 한번의 가족외식, ③ 자녀들이 고교졸업을 하면 자립시킬 것, ④ 외국어 하나를 구사할 수 있을 것, ⑤ 스포츠 한 종목을 즐길 수 있을 것, ⑥ 악기 하나 다룰 줄 알 것, ⑦ 자기 집만의 음식솜씨 하나를 지닐 것, ⑧ 환경문제에 자기 집 일 이상으로 민감할 것’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자족(自足)의 기쁨’인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젊은 시절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으나 고단한 삶의 지표와도 같이 자존심을 지켜주던 말이었다. 이 말을 생각해 하는 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가난 속에서도 자신 보다 어려운 아이에게 자신의 구두를 되돌려 달라고 하지 못했던 아이들, 동생에게 운동화를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오빠. 그들이 행복한 천국의 아이들이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유치환의 ‘행복’ 중에서)라는 시처럼 사랑할 줄 알았던 그 아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