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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를 찾아서[9] 며칠째나 연이어 눈이 내렸다. 마치 장마빗처럼이나 하늘이 뻥 뚫린 듯 온 산하가 폭설로 뒤덮였다. 곳곳에서 수도 파이프가 동파되기도 했지만 산에 들에는 눈꽃이 활짝 피었다. 눈꽃이 피는 날에는 사람이 그립다. 여느 때보다도 사람이 그립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오늘따라 별이가 무척이나 그립다. 창가에서 내다보는 불암산의 희디흰 눈꽃에서 별이를 떠올린다. 섣달 그믐날 밤, 식탁에 촛불 하나 켜놓고 차를 마신다. 순간 녹차향에 흠뻑 젖는다. 그리움이 한껏 솟구친다. 별이는 지혜로운 여자다. 지혜로움이란 유별난 것에서, 억지로 짜 맞추는 것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다. 지혜로운 여자는 메우 일반적이고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때그때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어쩌다가 넘어가 버리는 것, 서둘다가 놓쳐 버리는 것들이 없다. 간혹 실수를 범했을 땐 그것을 곧바로 시인하고, 미안해 하며 고칠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빼놓지 않고 하지만 또 필요할 때는 어김없이 침묵한다. 별이 가슴엔 그런 것들이 늘상 강물처럼 흐른다. 무순 수신서(修身書)에 있는 틀에 박힌 지덕(知德)이나 정결(貞潔)만이 지헤로움일까. 별이는 또 자기를 실현하는 여자다. 여자의 자기실현, 이는 흔히 종교나 예술에서 정신적 작업에 몰두하는 창조자를 일컫지만 그에 앞서 여자가 여자이기 전에 지니는 인간적 인식의 요청이라 할 것이다. 인본(人本)의 심리학자 메스로우가 여성은 ‘생명의 욕구, 소속의 욕구, 사랑의 욕구, 자아존중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 등 다섯 가지 욕구를 지닌다고 했는데, 별이는 그 중에 자기실현에 강한 여자다. 그렇다. 보름 전에, 모처럼의 제주 나들이에서 별이는 자신의 삶에 분명한 획이 그어진다고 했다. 십 수년의 편협된 결혼생활을 되짚으며 한없이 혐오스럽다고 털어놓았다. 짧은 인생에 애써 마음을 학대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고 깨끗하고 고요해지기 위해 마음속의 불순물을 제거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은 태어나면서 결정되고 그 운명의 도표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겠느냐고, 자신에게서 떠나간 것과 지금 새롭게 얻은 것을 그대로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별이는 그렇듯 운명을 수용할 줄을 안다. 운명이란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생(生)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다독거리며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별이는 자기의 어디에 구정물이 튀었나 살펴서 닦아 주며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한 일들이야말로 없다고 여기는 자에겐 먼지 보다 작고, 있다고 여기는 자에겐 우주만큼이나 큰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밤 나는 모처럼 값진 명상에 잠기는 듯싶다. 빈 식탁 위에서 촛불이 한없이 외로워 보인다. 어떻게 사는 게 가장 나다운 것인지 곱씹어지는 시간이다. 그래, 까뮈의 말에 이런 게 있지.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살아야 한다.”고 이는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참답게 사는지를 깨닫게 하는 충언이지. 또한 이 말씀을 깊이 캐 보면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그 공 마저도 공했느니라.”는 부처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를테면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 인생의 참모습을 내보일 수 있다는 말들이다. 한데 인간의 참모습을 일상에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서 곧잘 비쳐진다. 남을 용서하되 자신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사람, 남에게는 너그럽되 자신에게는 까다로운 사람, 남에게는 순조롭되 자신에게는 분명한 논리에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일수록 진정 용서의미를 아는 사람일테니까. 별이가 그렇게 세상을 산다. 그게 별이의 색깔이요 멋이다. 그래서 별이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웃는다. 별이 가슴엔 언제나 그녀만의 독특한 향기가 잇다. 풀꽃 향기 그것이다. 별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어떤 것도 아늑하게 풀꽃 향기로 물드는 정감, 바로 내 가슴에 행복을 뜨겁게 달궈 낸 참사랑이었다. 그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지금 이 밤에 나는 고통과 힘겨운 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항하기에 정토(淨土)로 가는 길 또한 아직 멀기만 하구나. 창박은 눈꽃이 화사하다. 촛불 하나 켜 놓고 이 밤을 사른다. 내다보는 유리창에 별이 입술이 보랏빛으로 그려진다. 가슴 깊숙이서 솟구치는 그리움이 눈꽃 가지가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아 ! 사랑하는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