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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를 찾아서 오용수 …… 2학년이던 4월 3일 다랑쉬에 烽火가 오르고, 細花支署가 놈들에게 습격당했다. 국민학교가 불타고, 같은 시간에, 내 책보도 홀랑 타 없어졌다. 우리 집도, 앞집 옆집이 한거번에 잿더미가 됐다. 불길 속에서 살아 남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삼촌이 동네 순찰하다 총에 맞았다. 지서 관사 목욕탕에 숨었다가 화를 면한 뒷집 어르신, 누구는 또 얼결에 붙잡혀 칼에 찔려 숨졌다. …… 놈들은 긴 하품하며 숨진 백성 화장시키고도 美製 카빈총과 日製 99식총 수십 정 거머쥐고 유유히, 다시 山으로 가더란다. 세상에, 에게 빌어먹을! -軍作長詩 ‘개똥밭에도 이슬은 내린다’ 중에서 …… 아니나 다를까, 뜬소문은 뜬소문이 아니었다. …… 날이 새자 온 마을이 술렁였다. 동네마다 띄엄듸엄 놈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했다. 솔이 오라버니가 순찰길에 칼에 찔려 숨졌다고 했다. 저쪽은 이쪽을, 이쪽도 저쪽을 죽이고 죽였다고들 했다. …… -軍作長詩 ‘들국화’ 중에서 화두로 삼은 시는 나의 제4시집「개똥밭에도 이슬은 내린다」와 제5시집「들국화」에서 연작장시 속의 ‘다랑쉬’ 부분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다랑쉬는 내 고향 들녘에 있는 야트막한 산 월랑봉(月朗峰)의 속칭으로, ‘제주 4.3사건’ 현장(現場)의 한 곳이다. 사건 당시 그 다랑쉬와 주변에서 놈들이 이용했던 여러개의 토굴이 50년(1998년) ‘사건 현장 추적팀’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굴 속에서 놈들에게 희생된 양민들의 뼈와 함께 살림살이 조각들이 백일하에 드러남으로써 그 유족들이 또 한번 분노를 터뜨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소싯적 겪었던 그 ‘4.3현장’을 55년 만에 돌아본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고향 들녘이었다. 여간 감회가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해 연말에(12월 30일) 갑신년의 성산일출제(城山日出祭)를 보기 위해 고향을 찾은 때다. 참선비 김흥우 선생과 별이와 함께였는데, 성산포에 사는 이승익 시인이 안내를 맡아 주었다. 다랑쉬 들녘은 한겨울 날씨에 더하여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에 흐드러진 갈대숲이 몸서리치듯 떨고 있었다. 원혼(?魂)들의 울음소리가 그날따라 더욱 풀무질치는 듯 싶었다.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놈들의 만행이 섬뜩섬뜩 뇌리를 스쳤다. 놈들의 총칼 앞에 울부짖던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들… 그 원혼들이 구천(九泉)에서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다랑쉬에 올라보았다. 맵디매운 바람이 바싹 마른 갈대숲을 마구 후려치고 있었다. 원혼들의 분노의 응어리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었으랴. 해마다 4월 3일은 어김없이 내게로 온다. 그때마다 나는 고향의 들녘을 찾고 싶어진다. 55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며 한 남자이기를 뽐내고 싶어진다. 다랑쉬로 가는 길따라 손짓하는 갈대밭에서 뒹굴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면 들국화 송이 꺾어 들고 흰구름따라 훌훌 흘러가는 나그네이고 싶어진다. 그동안 여유없이 사느라 못다한 사랑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그렇다.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고향땅은 세상 그 어디보다 가장 좋은 곳이다. 그리고 비록 촌스럽고 덜 배웠어도 어머니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존재다. 출세 못한 아들이지만 당신 생애 유일한 자랑으로 여기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 무덤가에 핀 들국화 무더기가 문득문득 보고 싶은 것이다. 새삼 어머니의 가난이 그립다. 그렇다고 요즘의 내가 얼마나 넉넉해진 것이랴만, 이런 저런 일들에 관계하다 보니 안팎으로 지닌 것이 전보다 좀은 나아졌다. 그 중에도 내가 찾아 나선 정토(淨土)의 길목에서 별이의 만남이 여간 미덥지 않은데, 그간 이번 ‘4.3현장’ 기행에도 걸음을 함께 했다. 내친김에, 어머님 유택을 지척에 두고도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오늘에 안 계시는 어머님이 그립다. 그 어머님의 가난이 그립다. 명예가 없어도 좋고, 재물이 없어도 그만이다. 그저 단순하게 심심하게 살고 싶다. 반세기 만에 ‘4.3현장’을 다시 찾아 그 다랑쉬에 부는 바람을 쐰 연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더냐. 번뇌를 끊고자 함이요, 부처님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서다. 그게 내 여생(餘生)의 바람이요, 수행자로서의 삶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서다. 육칠 년 전이었지. 볼품없는 규모였지만 생을 걸었던 사업이 거덜난데다 급성위궤양을 앓던 여름, 산속 암자에서 요양할 때 한 선사에게서 들은 말이다. “도를 배우자면 먼저 자신이 가난해야 한다. 지닌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뜻을 반드시 잃는다”고. 그때 내가 얼마나 낯붉혀지던가, 팔자에도 없던 돈을 벌자고 설쳐댔던 일들이…. 그러고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다시 이런 저런 일들에 관계하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지닌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수행의 길에 점점 멀어진다 했거니. 세상에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세상을 뜨고 싶다. 작년 꼭 이맘때, 한국문화예술인법회에 몸담으면서부터 ‘이제는 단순하게 심심하게 살자’고 자꾸만 속을 비워내고 있다. 요즘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난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랴만, 요즘 나라 안이 온통 혼란스럽다. 땅바닥 경제로 일터 잃은 젊은이들이 수도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는 터에 쥔 자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가진 자는 제 몸뚱이 치부하기에만 흥청댄다. 어쩌다 우리네 현실이 이토록 참단해졌는가. 위정자들아 모리배들아 ‘제주 4.3’을 그대들이 아는가! 지난 몇 년간을 되돌아보자니 뭣하나 내세울 것도 없이 이리저리 바쁘게만 살아온 듯 싶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듯이, 세태가 각박해질수록 위정자와 국민,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 간에 믿음으로 더불어 살아야지 않을까. 배고프고 가난한 데서 보리심이 싹튼다 했거니, 너와 내가 다 그렇지는 못할지언정 더불어사는 지혜를 추스를 때가 바로 요즘이 아닐까. 내 어머니의 가난이 뼛속 깊이 그립다. 속을 하나하나 비워내며 내 이미 정토를 찾아 길을 나섰으니 이제 그만 단순하게 심심하게 여생을 살리라. 내 걷는 그 길목따라서 엊그제 ‘4.3현장’을 막 눈여겨 지나왔거니 더는 두려울게 없지 않느냐, 별이의 동행이 더없이 미더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