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건강식품 판매자의 의무위반과 손해배상 _ 사람의 신체·생명 관련 소송으로 살펴보는 손해배상책임

목 차
세상을 살다보면 원치 않게 타인의 잘못으로 크고 작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보통 이런 손해가 발생하면 불가피한 일로 여기고 감내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돈으로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큰 손해도 있다. 그런데 법에서 인정하는 손해배상의 범위와 대상은 비교적 엄격하다. 이번 호에서는 특히, 사람의 신체와 생명과 관련된 2가지 사건을 통해서 손해배상의 문제에 대해 접근해보자. [사례 1] 평소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A씨는 요통, 근력저하 등을 이유로 B 병원을 찾은 뒤 입원치료를 받았다. 며칠 뒤 B 병원의 C의사는 초음파 검사를 시행한 뒤 “A씨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뇌졸중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이라고 A씨와 가족에게 설명했다. 그로부터 약 30분 뒤 이 병원의 마취과 의사 D씨는 수술을 위해 A씨에게 마취를 시작했고 인공디스크 치환술 등의 수술을 시행했다. 수술 뒤 회복실로 옮겨진 A씨는 자발적으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고 왼쪽 팔다리 근력이 저하되는 증상이 발생했다. 급기야 A씨는 모든 생활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인지장애로 인하여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며, 스스로 용변을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환자에게 부작용 설명 30분 후 수술 … 병원측의 과실은?
여기서 쟁점은 B 병원측의 일련의 치료행위 과정에서 과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다. 1심과 2심이 부정한 것과 달리, 대법원은 병원측의 과실을 인정했다. 어떤 근거에서였을까? 일반론으로 접근해보자. 법률적으로는 고의 또는 과실이 존재하고, 타인에게 손해가 발생했으며, 두 가지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 민법에 나오는 대표적인 손해배상발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이다. 의료인의 치료행위 과정에서 환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도 환자측은 의료인의 채무불이행 또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사가 의료계약(환자에게 진료비를 받고 의료행위를 하기로 한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면 채무불이행, 의료행위 중에 의료인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불법행위가 성립될 수 있다. 세분화하면 의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가 있다. • 진료의무(최선을 다해 치료할 의무) • 비밀준수의무(의료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의 비밀누설금지 의무) • 진료기록의무(의료행위에 관한 사항과 의견을 상세히 기록할 의무) • 설명의무(환자가 자기 질병, 치료 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증상, 치료방법의 필요성, 예상되는 위험 등을 설명할 의무) • 주의의무(환자의 증상, 상황에 따라 위험방지를 위해 최선의 조치를 할 의무) 사례에서는 ‘주의의무’와 ‘설명의무’가 문제가 됐다. 법원은 이 중 ‘주의의무’ 위반은 인정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수술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에 합리적인 범위를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고, 수술과정이나 수술을 마친 다음 A씨의 경과관찰을 게을리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의사의 설명은 충분한 시간 두고 … 위반 시 환자의 선택권 침해”
그러나 ‘설명의무’에 대해서는 하급심과 대법원의 입장이 엇갈렸다. 1심과 2심은 “B 병원측 의사들의 설명이 있었다.”며 설명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대법원은 달랐다. 설명의무에 대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수술 등 인체에 위험을 가하는 의료행위를 할 경우 그에 대한 승낙을 얻기 위한 전제로서 환자에게 질병의 증상, 치료방법의 내용 및 필요성, 발생이 예상되는 병명, 신체에 대한 위험과 부작용 등에 관하여 당시의 의료수준에 비추어 환자가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환자로 하여금 수술 등의 의료행위에 응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 의무가 있다.” 대법원은 이어 “설명의무는 의료행위가 행해질 때까지 적절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이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환자에게 의사를 결정함에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의료행위에 관한 설명을 한 다음 곧바로 의료행위에 나아간다면 이는 환자가 의료행위에 응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B 병원측이 수술에 앞서 불과 30분 전에 A씨의 가족에게 부작용 등의 설명을 한 뒤 곧바로 마취와 수술을 시작한 것은 설명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례 2] 고혈압, 뇌졸중, 심근경색 등으로 장기간 고생을 하던 E씨는 약물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건강보조식품을 판매하는 F씨를 알게 되었다. F씨는 “핵산을 먹고 면역력이 올라가면 몸이 좋아진다.”며 E씨에게 핵산으로 가공한 제품을 권했다. 하지만 E씨가 제품을 복용한 뒤에도 증세가 좋아지기는커녕 한기와 통증이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F씨는 “호전반응의 시작이다. 몸에 잘 듣고 있다는 뜻이니 걱정 말고 견뎌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후에도 F씨는 ‘반드시 아파야 낫는다.’는 문자를 전송하거나 ‘부작용 없는 약은 없다.’, ‘병을 부추기는 과잉치료’라는 제목의 글들을 공유하는 등 E씨에게 지속적으로 조언을 했다. E씨의 증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주위에서 병원치료를 권했으나 E씨는 “독소가 빠지는 중이라서 더 버티겠다.”며 거부했다. E씨는 병원치료 대신 F씨가 권한 건강식품을 추가 구매하면서 제품의 섭취량을 늘려갔다. 약 20일이 지나자 E씨는 급격히 증세가 악화되었고, 119 구급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패혈증, 장기부전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건강보조식품 판매자도 고객보호의무 있다
2번째 사례는 의사가 아닌 건강보조식품 판매자(사례의 F씨)에게도 법적인 의무(고객보호의무)가 있는지, 의무위반 시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법원은 F씨와 같은 판매자에게도 “건강보조식품의 치료 효과나 부작용 등 의학적 사항에 관하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고객이 긴급한 진료를 중단하는 것과 같이 비합리적인 판단에 이르지 않도록 고객을 보호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고객의 상황에 비추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의학적 조언을 지속함으로써 고객에 대한 보호의무를 위반한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진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E씨의 진료기록을 전문의에게 감정의뢰한 결과 “E씨가 지체 없이 진단, 치료를 받았다면 생명이나 건강상태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런데도 의학지식이 없는 F씨는 E씨의 증세악화를 ‘호전반응’이라고 계속 주지시켰다. 또한 “병원에서 치료받는 대신 제품을 더 섭취하라”고 부추겼다. E씨는 치료시기를 놓치고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위 사례에 나오는 ‘건강보조식품’은 기타 가공품으로 분류되고, 인체에 유용한 기능성을 가진 원료나 성분을 사용하여 제조한 ‘건강기능식품’과도 다르다. 또한 F씨가 설명한 호전반응도 ‘장기간에 걸쳐 나빠진 건강이 호전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반응’으로 알려져 있으나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의학전문 지식이 없는 판매자가 중증환자에게 의학적 조언을 하면서 병원치료 대신 제품섭취만 권유했던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치료받았다면 사망 가능성 낮은데도 제품섭취만 권유” 배상책임
법원은 “E씨가 증상 없이 지체 없이 치료받았다면 생명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F씨의 보호의무 위반과 E씨의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서 F씨의 유족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이 사건으로 F씨는 일실수입(E씨가 사망하여 노동력이 상실됨으로써 잃게 되는 수입), 위자료(정신적 손해에 대한 금전배상) 등의 금전을 E씨의 유족에게 지급하게 되었다. 사람의 생명, 신체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겐 법적 의무도 뒤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