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ㆍ출판의 자유, 집회ㆍ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모두 헌법에 나오는 말이다. 얼마나 좋은 말만 골라서 썼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게다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제37조 제1항)는 조항에서는 국민을 위하는 세심한 배려까지 엿보인다. 헌법은 모든 법률의 토대가 되며, 국민 기본권 보장의 근거가 된다. 이런 기본권이 현실에서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를 찾아야 한다.
동성동본 부부 “우리도 결혼하게 해주세요!”
1995년, 관청에서 혼인신고를 거부당한 동성동본 부부들이 헌재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 규정 때문에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했다.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가 전국에 200만 ~ 300만 명이 넘는 세상이다. 지금은 봉건적인 농경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법은 촌수를 따지지도 않은 채 동성동본이면 무조건 결혼을 못 하게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혼인의 상대방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우리도 결혼하게 해달라!” 헌재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법 조항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제한한다는 취지로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 직후 20만 쌍으로 추정되는 동성동본 부부가 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현행 민법은 8촌 이내의 혈족끼리 결혼하는 것만을 금지하고 있다. 1999년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 사이에서 환호와 탄식이 엇갈린 해였다. 헌재가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제도는 위헌”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국가는 「제대군인지원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7급, 9급 공무원 응시자 중 방위병 출신(군복무 1년 이상 ~ 2년 미만)에게는 3점, 현역병 출신(2년 이상)에게는 5점의 가산점을 부여해왔다. 헌재는 이 제도가 “수많은 여성의 공직 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신체 건장한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를 차별하는 제도”라며 결국 “여성과 군대를 가지 않은 남성의 평등권과 공무담임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 결정이 나오자 여성 단체와 장애인 단체는 환영의 뜻을 밝힌 반면, 많은 남성은 “군복무 기간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마저 사라졌다”며 불만을 드러내는 등 논란이 지속됐다. 어쨌거나 이 결정은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금지를 국가가 분명히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재외국민 선거 참여가 가능해진 까닭은?
“외국에 거주하는 국민도 투표할 수 있게 해달라!” 한국 국적을 보유한 미국, 일본, 영국 등의 영주권자들이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국내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자’만이 선거권을 행사하도록 한 법률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헌재는 1999년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주면 공정성 확보가 어렵고, 선거 기술상 힘들다는 이유로 합헌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07년 이 결정을 뒤집었다.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의 과제이므로 이를 이유로 선거권 행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 선거비용의 부담 우려로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결국 재외국민에게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은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회가 법을 개정함으로써 재외국민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낙태죄, 임신부의 자기결정권 침해”
산부인과 의사 A씨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을 상대로 암암리에 낙태수술을 해주었다. 낙태수술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선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적발되거나 처벌되는 사례도 거의 없었다. A씨는 다른 사건 조사 과정에서 낙태수술을 한 사실이 적발되는 바람에 형사법정에 서게 됐는데, 낙태죄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012년 낙태죄 처벌이 합헌이라고 판단했던 헌재가 2019년엔 낙태죄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현행 낙태죄가 “임신 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하도록 정함으로써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ㆍ출산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학업ㆍ사회활동ㆍ경제적 사정으로 감당할 여력이 안 되는 경우 ▲임신한 후 남성과 헤어진 경우 ▲미성년자가 임신한 경우 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ㆍ경제적 사유로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현실을 법이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임신한 여성이 출산 여부에 대하여 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기 이전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데도 현행법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다. 헌재는 다만 “낙태를 금지하고 형사처벌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경우에 헌법에 위반된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낙태결정 가능 기간과 사회적ㆍ경제적 사유, 요건과 절차 등에 대해 2020년 말까지 법을 만들 것을 국회에 주문했다(그러나 현재까지 대체입법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헌법재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헌법소원과 위헌법률심판이 있다. 헌법소원은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을 침해받은 사람이 권리를 구제받기 위해 청구하는 제도다. 권리구제의 최후 수단으로서만 가능하며, 반드시 변호사를 선임하여야 한다. 앞의 사례 중 제대군인 가산점 사건과 재외국민 참정권 사건, 낙태죄 사건이 헌법소원으로 기본권을 구제받은 경우다. 위헌법률심판은 재판 중인 사건을 적용하는 법률(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의심이 있을 때 법관이 심판을 제청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컨대 지금은 폐지된 형법의 간통죄와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조항, 호주제도는 관련 사건의 재판을 담당하던 판사가 헌재에 위헌제청을 했던 경우다(이 중 간통죄는 다섯 번의 심판 끝에 2015년 2월 “성적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그 후 형법에서 간통죄 조항은 삭제됐다). 헌재는 그 밖에도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등에 대한 탄핵심판과 국가기관 상호 간,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상호 간의 권한에 대해 판단하는 권한쟁의심판을 맡고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 2차례 ‘인용’, 행정수도는 ‘위헌’
헌재가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 결정, 정당해산 결정, 헌법소원 인용결정을 하려면 다수결로는 부족하다.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2015년 선거 기간 중 ‘인터넷실명제’를 실시하도록 한 공직선거법 관련 조항에 대해 9명의 재판관 중 5명이 위헌에 표를 던졌지만 합헌으로 결론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헌재는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경우 ① 즉시 법의 효력을 없애는 ‘위헌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② 법개정 때까지 한시적으로 효력을 유지시키는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2018년 헌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제를 도입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여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면서 국회에 2019년 말까지 법 개정을 주문했다(2019년 12월 국회는 「대체역의 편입 및 복무 등의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로써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은 군대 대신 교도소 등 교정시설에서 현역병 입영기간의 약 2배에 달하는 기간 동안 대체복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낙태죄 사건도 2020년 말을 법 개정시한으로 정한 헌법불합치결정이다. 현직 대통령 탄핵심판이라는 중대한 사건도 벌써 세 차례나 재판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이유 없다”며 기각했지만,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이어, 2025년 4월 윤석열 대통령 탄핵까지 인용함으로써 임기 중인 대통령이 물러나는 선례를 2차례나 남겼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헌재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사형제도,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 부여, 성매매 형사처벌(이상 합헌), 행정수도 건설, 영화사전심의, 간통죄, 낙태죄, 호주제도(이상 위헌) 등 우리 사회의 이슈들이 헌재의 심판을 받을 때마다 사람들은 울고 웃었다. 갈수록 헌재의 판단이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