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례 1] 어느 날 새벽 서울역 대합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 노숙자 A씨가 만취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순찰을 돌던 서울역 직원 B씨는 동행했던 사회복무요원에게 “노숙자를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사회복무요원의 손에 이끌린 A씨는 20m 떨어진 대합실 출구 앞 대리석 바닥에 던져져 방치됐다. 잠시 후 현장에는 또 다른 사회복무요원 C씨가 “수습하라”는 무전을 받고 나타난다. 그는 A씨가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에 바지가 벗겨져도 모를 정도로 의식을 잃었는데도 휠체어에 태운 후 역사 외곽으로 옮겨 놓았다. A씨는 낮 12시경 숨진 채 발견됐는데, 사인은 흉부의 고도손상이었다. 결국 A씨는 제때 부상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언이 있다. 달리 말하면, 법은 도덕의 범주 안에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입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도덕의 영역으로 두고 어디부터 법의 영역으로 봐야 할지 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노숙자 A씨를 내보낸 B씨와 C씨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만일 A씨를 병원으로 후송했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행동은 비난받을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법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검찰은 두 사람을 유기죄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그 내막은 글 말미에 소개한다).
[사례 2] 자정에 가까운 시각, 택시기사인 D씨는 버스정류장 인근 도로에 있던 20대 남성 E씨를 택시에 태웠다. E씨에게선 술냄새가 났으나 그는 목적지와 도로 진행방법을 정확하게 얘기할 정도여서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 목적지로 가던 도중, 화물차가 세워진 갓길 부근에서 갑자기 E씨가 택시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D씨는 E씨가 화물차 운전자라고 생각하여 갓길에 택시를 세웠고, E씨는 준비한 지폐를 꺼내 택시비를 지불한 후 하차했다. 그는 갓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승용차의 범퍼에 들이받혀 사망하고 말았다. D씨는 승객을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유기치사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사례 3] 추운 겨울밤, 친구들과 함께 술을 잔뜩 마셔 이미 취한 60대 남성 F씨는 홀로 주점을 찾았다. 사장인 G씨는 F씨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매상을 올리기 위해 여종업원을 통해 술을 계속 권했다. F씨는 새벽까지 양주 2병을 포함해 상당량의 술을 마시게 됐다. 새벽 3시 F씨가 인사불성이 되자 G씨는 F씨의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술값으로 챙겼다. 그런 다음에는 가게를 나서는 F씨를 그냥 내버려 뒀다. F씨는 곧 길거리에 쓰러져 동사하고 말았다.
사례에서 택시기사 D씨, 주점사장 G씨는 손님을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방치한 셈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모두 처벌을 받아야 할까?
“유기죄는 법률상ㆍ계약상 보호 의무 있어야 성립”
결론에 앞서 적용 법 조항부터 따져 본다. 두 사람을 법정의 피고인석에 세운 죄명은 형법의 유기치사죄로, 사람을 유기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형법의 유기죄는 다음과 같다. “노유(老幼), 질병 기타 사정으로 인해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를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주의 깊게 볼 대목은 ‘법률상 또는 계약상 의무 있는 자’이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보호했어야 할 책임만으로는 죄가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노부모를 모시는 자식,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사고 운전자를 발견한 경찰 등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판례는 유기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률상, 계약상 의무 있는 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부조를 요하는 자(요부조자)에 대한 보호책임의 발생원인이 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기한 부조의무를 해태한다는 의식이 있음을 요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특히 ‘계약상 의무’는 예컨대 간호사나 보모와 같은 주된 의무가 부조를 제공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부수적 의무인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례 2>의 D씨는 어떻게 되었을까? 법원은 “유기죄의 죄책을 인정하려면 보호책임이 있게 된 경위, 사정 등을 따져야 할 것”이라며 형사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보았다. 법원은 ▲승객인 E씨가 만취상태였다고 보기 어려운 점 ▲택시 승하차 시 정상적인 정신상태에 있었던 점 ▲E씨의 하차장소가 도로이긴 하지만 화물차가 상시적으로 주차되어 위험성이 적어보인 점 ▲E씨가 택시요금을 지불하면서 하차(운행계약의 종료)를 요구한 상황에서 운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점 등을 참작,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D씨의 행동에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 별다른 조치 없이 현장을 떠난 사정만으로는 유기죄나 유기치사죄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례 3>의 G씨도 마찬가지 아닐까? 술집 주인이 손님 귀갓길까지 챙길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 들만도 하다. 법원은 법조문에서 ‘기타 사정으로 인해 부조(扶助)를 요하는 자’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술집 주인은 손님이 술에 만취해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안전하게 귀가하도록 조치하거나 술이 깰 때까지 술집에 있도록 할 주의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만취 손님 귀갓길 방치한 술집 주인은 징역형
법원은 “이미 상당량의 술을 마신 손님을 다음 날 새벽까지 마시게 한 후 노상에 방치할 경우 동사의 위험이 있음은 경험상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며 “F씨를 길거리에 그냥 내려놓고 방치한 이상 유기치사죄 인정은 정당하다”고 결론지었다. G씨와 종업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례 1>의 무죄판결을 살펴보자. “서울역 직원이나 사회복무요원은 노숙자를 보호할 법률상 의무가 있다”는 검찰의 주장을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한국철도공사법 등에는 직원의 부조 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이 없다”며 “민법상의 사무 관리나 관습, 조리 등에 의해서 유기죄의 부조 의무를 확장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고 법관의 자의적 판단을 초래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을 고치지 않는 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판사는 판결 말미에 ‘판결을 마치며’라는 제목으로 소회를 털어놓고 있다. 판사는 “노숙자였던 망인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 참으로 고달픈 하루를 보냈을 것”이라며 “피고인들에게 유기죄의 형사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망인의 죽음 앞에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심경을 드러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아직 없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거리에서 응급환자나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 현행법상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대로 법률상ㆍ계약상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에 빠진 상대를 돕는다 해서 자기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진다거나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는데도 구조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국회에서도 관련 법을 제정하거나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진척은 없는 상황이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을 도덕에만 맡겨도 될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현행 형법 중에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없다. 대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다가 다치거나 사망하면 보상을 해주는 법은 있다. 「의사상자(義死傷者)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직무 외의 행위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ㆍ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의사자), 또는 부상을 당한 사람(의상자)과 유족에게는 국가가 그에 걸맞은 예우와 지원을 하게 된다. 즉 법률상, 계약상 의무가 없는데도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게 되면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게 되는 제도이다. 의사상자와 유족은 보상금은 물론 의료 급여ㆍ교육 보호ㆍ취업 보호ㆍ장제비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법에서 인정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강도ㆍ절도ㆍ폭행ㆍ납치 등의 범죄행위를 제지하거나 그 범인을 체포하다가 사망 또는 부상 ▲자동차ㆍ열차, 그 밖의 운송 수단의 사고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ㆍ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 또는 부상 ▲그 밖에 다른 사람의 생명ㆍ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구조행위를 한 때에 해당한다. 법원은 구원 요청을 받고 강도를 체포하려던 의인이 오히려 범인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경찰에게 강도 공범으로 오인되어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경우에도 의사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강 상류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이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급류에 휘말리는 바람에 익사한 용감한 청년 역시 의사자로 인정했다. 가끔씩 지하철이나 기차선로에 떨어진 시민을 구한 의로운 이의 소식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그 소식에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에 앞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법이 정비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